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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군 가례면의 역사적 명소를 표적 있게 하자

허만길 시인 / 문학박사 (전 문교부 국어과 편수관)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3년 07월 20일

의령군 가례면의 역사적 명소를 표적 있게 하자
- 예촌 허원보 선생 기념사업을 겸하여 -












▲ 허만길 문학박사
▲ 들어가는 말
  나는 현재의 의령군 가례면과 관련된 네 편의 소논문을 통해 가례면의 조선 전기 및 중기의 역사적 인물과 조선 전기 가례(嘉禮)의 지명 형성 및 변천 과정을 밝히면서, 가례면은 예와 학문과 시와 나라사랑의 고장으로서 역사적 인물 향기와 지명 가치가 위대한 땅이라고 했다. 이것은 잊혀 있던 가례면을 포함한 의령군의 역사의 중요 부분을 어렵게 발굴한 일이기도 하다.
  이 네 편의 소논문은 ‘의령신문’(발행 의령신문사, 경남 의령군 의령읍)을 통해 발표하였는데, ‘김해 허씨(許氏)의 의령 정착 과정’(의령신문 제298호 2012년 3월 23일 2쪽), ‘의령군 가례를 몹시 사랑한 허원보의 삶’(의령신문 제305호 2012년 7월 13일 3쪽), ‘의령군 가례를 사랑한 허원보의 자녀와 인척’(의령신문 제310호 2012년 9월 28일 3쪽), ‘조선 전기 허원보의 의령군 가례 이주에 따른 지명 형성’(의령신문 제316호 2012년 12월 27일 3쪽) 등이다. 나는 이들 소논문의 내용과 관련지어, 가례를 기리는 시 ‘가례’를 ‘의령문학’ 제16호(215-217쪽. 발행 의령문인협회, 경남 의령군 의령읍. 2012. 12. 30.)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앞의 소논문들의 연속선상에서 의령군 가례면의 역사적 명소를 표적 있게 하는 사업을 벌여, 가례면을 예와 학문과 시와 나라사랑의 명품 고장으로 드러나도록 할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 예촌 허원보는 조선 시대 주요 인맥의 꼭대기 사람
  고려 후기 1321년 문하시중(영의정, 국무총리에 해당)을 지낸 허유전(許有全)의 손자 호은(湖隱) 허기(許麒)는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키자 고려 충신으로서 경상도 고성(철성)에서 절개를 지켰다. 허기의 증손자의 한 사람 허원보(許元輔 1455년, 세조 1년-1507년, 중종 2년)가 혼인 후 새살림을 의령현 가례(嘉禮. 현재 의령군 가례면)에서 꾸렸다. 나는 조선 시대는 혼인 시기가 빨랐다는 점과 허원보의 장남 허수(許琇)가 1478년에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여, 1480년 전후로 허원보가 의령현 가례로 이주하였으리라고 추정했다. 허원보는 의령현 가례에 들어와 살면서, 그와 그의 인맥은 가례와 의령현을 역사적인 큰 의미를 지닌 지역이 되게 하고,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그의 후손과 인척들은 나라를 구하는 구심체가 되었다. 따라서 허원보는 조선 전기와 중기에 걸친 역사적 주요 인맥의 꼭대기 사람이었다.
  허원보의 조부 허유신(許惟新)은 조선 초기 문과에 급제하고 영산(창녕) 현감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 허여(許旅)는 조정에서 적순부위사정(迪順副尉司正)을 지냈고, 그의 형 허원필(許元弼)은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정3품) 상의원(尙衣院) 판관과 군수를 거쳐, 야인(여진족)의 국경 침입 격퇴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올랐다. 이렇게 조상 대대로 학문이나 애국충정이 특별한 가문의 후손인 허원보는 새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이곳을 부를 이름이 필요했다. 나는 허씨(許氏) 조상들에게서 전해 오는 말로서 ‘가례(嘉禮)’는 허원보가 지은 이름이며, 그의 호 예촌(禮村)은 ‘가례(嘉禮)’의 끝 글자를 따서 역시 그가 지었다는 것이 족보 및 묘비문 등과 관련지어 볼 때 신빙성 있는 일이라고 했다. 허원보는 선비로서 새 지역을 어떻게 가꾸어야 할 것인가 하는 포부가 있었을 것이므로, ‘예를 아름답게 밝힌다’는 뜻을 지닌 ‘가례(嘉禮)’로 이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례’의 지명을 허원보의 손녀의 남편 퇴계 이황(1501-1570년)이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 추측은 가능성 없는 일임을 강조한 바 있다.
  허원보는 경치 좋은 가례 ‘백암’(白巖. 흰바위) 바위 근처에 정자를 지어 ‘白巖’(백암)이라 현판을 걸었는데, 지금도 그 바위가 전하고 있으며, 나무로 건축되었던 백암정은 거듭 새로 지어지다가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말미암아 2013년 현재도 파손된 모습으로 남아있다. 26살에 사마시(생원시 및 진사시를 가리키며, 퇴계 이황이 쓴 글에는 허원보를 ‘생원’이라고 하였음.)에 합격한 허원보는 그 시대에 유명한 학자이며 벼슬아치였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김영(金瑛) 등과 백암정 근처 물굽이에 술잔을 띄워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깊게 사귀었다. 그는 젊은이 62명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를 설명하고 문장을 논했다(講道論文).
  호군(護軍. 정4품)을 지낸 해주 오(吳)씨 오한(吳漢)의 사위인 허원보는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허수(許琇)는 한양에서 선릉(宣陵: 조선 성종의 능) 참봉(參奉) 등의 벼슬을 지냈고, 허수의 장인은 감사(관찰사. 도지사)를 지낸 윤수천(尹壽泉)이다. 둘째아들 진사 허찬(許瓚)은 춘추관 편수관, 성균관 사성, 청풍 군수를 지낸 문경동의 맏사위이다. 셋째아들 허경(許瓊)은 참봉, 넷째아들 허연(許璉)과 다섯째아들 허관(許瓘)은 생원, 여섯째아들 허환(許環)은 습독(習讀. 훈련원 무관직)이었다. 허원보 맏딸의 남편 박양(朴良)은 선전(宣傳: 선정관청의 무관), 둘째딸의 남편 박운(朴芸)은 무과 급제하고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 종2품)를 지냈다. 허원보의 손자 허안세(許安世. 허수 장남)는 중훈대부(종3품) 예빈시(禮賓寺) 참봉, 허안정(許安鼎. 허수 차남)은 군자감정(軍資監正. 정3품), 허윤렴(許允廉. 처음이름 허사언許士彦. 허찬 차남)은 진주 목사를 지냈다. 허원보의 손자 허사렴(許士廉. 허찬 장남)은 퇴계의 처남이자 제자로서 유학자인데, 퇴계와 퇴계의 제자에 대해 기록해 둔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올려 있다. 허원보의 손자 허안인(許安仁. 허관 아들)은 죽은 뒤 가선대부(종2품) 형조참판의 벼슬을 받았다. 허원보의 손녀의 남편으로서 퇴계(退溪) 이황(李榥), 충의위(忠儀衛)를 거친 김진(金震), 군수를 지낸 박옥형(朴玉衡), 생원인 이경춘(李景春)이 있다. 허원보의 증손자 허언심(許彦深. 허안인 아들)은 무과에 급제한 의병 장령이며, 임진왜란 후 가선대부(문관 종2품)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허원보의 증손녀(허사렴 큰딸)의 남편 오운(吳澐. 본관 고창. 함안 출신)은 문과 급제 후 충주 목사, 광주 목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병 장령으로서 경남 백령(白嶺)에서 의병을 모아 곽재우 장군과 힘을 합쳤으며, 정유재란 때도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오르고 경주 부윤(종2품), 공조참의를 지냈다. 허원보의 또 다른 증손녀(허사렴 둘째딸)의 남편 박녹(朴漉. 본관 반남)은 경북 영주 사람으로서 고향 사람들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었으며, 태릉(조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능) 참봉,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특히 1521년 허원보의 손녀(허찬 큰딸)와 혼인한 퇴계 이황은 가례를 포함한 의령현(의령군)을 학문과 시가 융성한 지역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퇴계는 가례의 경치 좋은 골짜기 바위에 ‘嘉禮洞天’(가례동천: ‘가례에 있는 산과 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의 뜻) 글자를 남겼다. 김해 허씨 족보에는 퇴계가 그의 처조부 허원보가 건축한 백암정에 올라 시를 읊었음도 나타나고 있다. 퇴계는 허씨 부인이 별세한 뒤에도 가례 처가에서 여러 시를 남겼다. 허원보의 또 한 손녀(허경 큰딸)는 곽재우(1552-1617년)의 세 살 적부터 계모(곽월 후처)가 되어 친정에서 기른 학문과 애국충정의 정신을 곽재우 장군에게 가정교육으로 영향을 미치고,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褀)를 낳아 곽재우 장군을 도와 눈부신 의병 활동을 하게 하였다. 곽재우 장군의 아버지 곽월(郭越 1518-1586년. 황해도 관찰사)은 퇴계와 4촌 동서간이 된다. 곽재우 장군 지휘 아래 있던 17장령(장수) 중 허언심(許彦深)은 허원보의 증손자이며 곽재우 장군의 매부인데, 곽재우 장군은 허언심의 부제(婦弟: 부인의 남동생)이다. 의병 17장령 중 오운(吳澐)은 허원보의 증손녀(허사렴 큰딸)의 남편이고, 경북 영주의 의병장 박녹(朴漉)도 허원보의 또 다른 증손녀(허사렴 둘째딸)의 남편이다. 이렇게 허원보의 후손과 인척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의 구심체였다. 특히 허원보의 증손자 의병장령 허언심은 가례에 살면서 진주에도 재산이 많았는데, 군량 수천 석을 내놓았고, 의병의 의식주와 전투 자금 마련에 힘을 썼고, 곽재우 장군의 가족을 돌보면서 싸웠다.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은 임진왜란 6년 전에 죽었으므로, 곽재우의 의병 활동에는 자신을 길러 준 계모 허씨 부인, 허씨 부인이 낳은 이복동생 곽재지와 곽재기, 그의 매부 허언심을 비롯한 허원보의 가문, 허원보의 증손녀의 남편 의병 장령 오운이 큰 버팀목이 되었다.
  이렇게 예촌 허원보는 조선 시대 주요 인맥의 존재감 우뚝한 꼭대기 사람이었다.
▲ 예촌 허원보 선생 기념비 세우기와 기념행사 제의
  가례면을 포함한 의령군 인물 역사에서 조선 시대 주요 인맥의 꼭대기 사람인 예촌 허원보 선생을 위해 후세인들이 기념사업을 펼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 수 없다. 가례면과 의령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례면에 ‘예촌 허원보 선생 기념비’를 세우고, 해마다 예와 시와 나라사랑과 관련한 기념행사를 시행할 것을 제의한다. 나는 앞 논문(의령신문 제316호 2012년 12월 27일 3쪽)에서 허원보가 ‘가례(嘉禮)’라고 했던 지역은 오늘날의 가례면(嘉禮面) 지역에 해당하며, 허원보가 살던 마을 이름은 당시에 ‘백암촌(白巖村)’이라 했는데, 현재의 ‘가례(加禮) 마을’에 해당한다고 밝혔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 가례면의 역사적 명소 표적 만들기
  허원보가 약 530년 전(1480년 전후)에 처음 짓고 ‘백암(白巖)’이라 현판을 걸었던 ‘배암정’(白巖亭)은 비바람에 허물어질 때마다 가례 주민들이 자존심을 걸고 새로 지으며 역사적 전통을 이어 왔다. 아마도 백암정 자리는 가례면에서 사찰을 제외하고는 역사적 근거한 확실한 가장 오래된 건물의 유적지가 될 것이다. 10년 전 태풍에 상처 입은 백암정이 어서 다시 서기를 기다리며, 그곳에서 예촌 허원보, 퇴계 이황을 비롯해 많은 선비들을 생각하며 뜻 깊은 행사가 열리기를 바란다.
  퇴계는 1533년(계사년癸巳年) 봄에 남도여행(남도유람)을 하면서, 처가가 있는 백암촌(현재 가례加禮 마을)에 여러 날 머물렀다. 퇴계는 매화를 소재로 한 시를 많이 남긴 학자로 유명한데, 매화를 소재로 한 최초의 ‘매화시’를 이 백암촌에서 썼다. 이 시에서 퇴계는 의령에서도 좋은 세상이 따로 있으니 그곳이 백암촌이며 여기에는 숲 정원이 많다고 하고서, 숲 속에 핀 매화를 소재로 시를 썼다. 백암촌에서 쓴 다른 몇 편의 시에도 매화가 등장한다. 이런 역사적인 정서를 고려하여 매화를 가례면을 상징하는 꽃으로 하고, 가례(加禮) 마을을 비롯해 가례면(嘉禮面)에 매화를 특별히 많이 심고, 봄철에는 매화제(梅花祭)를 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내가 앞 논문에서 밝혔듯이, 허원보의 둘째딸의 남편 박운(朴芸)은 무과에 급제하고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 종2품)를 지냈는데, 퇴계의 처고모부가 된다. 그는 처가가 있는 가례에 와서 살면서 퇴계와 가까이 지냈다. ‘밀성 박씨 졸당공파보’(密城朴氏拙堂公派譜) 권1(38쪽. 1990)의 ‘학행유일편’(學行遺逸篇)에는 퇴계는 박운이 사는 마을을 ‘수성(修誠)’이라 이름하고, 그 골짜기에 ‘嘉禮洞天’(가례동천)이라 적었다고 되어 있다. 류필영(柳必永 1841-1924년)이 쓴 박운의 묘갈명에는 박운은 청백리에 기록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경치 좋은 가례(嘉禮)로 와서 수성정사(修誠精舍)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며 세상을 마쳤다고 되어 있다. 박운은 삼가현 송지촌(현재 합천군 대병면)에서 살았는데, 밀양 박씨 졸당공파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의령현 가례에 들어와 살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퇴계가 남긴 글씨 근처에 ‘수성정사(修誠精舍)’의 흔적을 알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현재 가례면에는 해남 현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과 충의를 약속했던 퇴휴헌(退休軒) 박서휘(朴瑞輝)의 재실인 고금정(鼓琴亭)이 있는데, 박서휘의 조부가 바로 박운이다. 밀양 박씨 졸당공파에서도 수성정사를 표적 있게 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맺는말(가례면 향토사 자료집 편찬을)
  가례면에는 선사 시대의 유적지가 있으며, 유래가 특이한 지역들이 많다. 이들과 내가 위에서 말한 가례면의 역사적 명소를 표적 있게 하는 사업을 전개하여, 역사적 교훈의 자리로 활용하기를 바란다. 가례면사무소와 가례면 주민들은 내가 힘을 기울여 연구한 논문들과 시 ‘가례’가 오래 전해지도록 하고, 다른 여러 유익한 향토 자료들도 오래 남도록 하고, 전국에서 가례면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가례면 향토사 자료집’을 편찬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3년 0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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