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지하철을 탔다. 어느 역에 도착했는데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뒤에 따라오는 영감을 자기와 나 사이의 빈 좌석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면서 권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우리좌석 건너편에 중년부인들 사이에 가서 앉았다.
보아하니 그 부인은 어느 정도의 교양도 있어 보였다. 그 남자노인은 젊은 한 시절 사회적으로 힘깨나 쓰던 분 같았고, 나이는 90세는 넉넉히 되어 보였다.
그런데 자기부인이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는데도 굳이 그 젊은 두 여인들 사이에 가서 앉는 심리는 무엇일까. ‘노인도 젊은 여자가 옆에 앉으면 좋아 한다’더니 자기 부인보다는 젊어 보이기는 했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인품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는데, 그렇게 젊음이 좋은가.
그러다가 두 여자 중 한분이 자리를 비우자 내 옆에 앉았던 그의 부인이 번개같이 날아가서 그 영감 옆에 앉는다. 그 영감은 체구가 매우 건장하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해 보이고, 타협을 모르는 고집스러운 남자로 보였다.
그 시대의 남자들은 가부장제가 몸에 배이고, 부인은 남자의 부속물(所屬物)로 취급되던 시절이라, 여자는 그런 운명을 타고 나서 팔자로 받아들이던 시대이다. 말하자면 남자가 어떠한 길을 선택하든지 어떤 일을 시키든지 여필종부(女必從夫)로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고, 자기의 길로 알고 살아 왔던 시대이다.
쫓겨나는 일은 있어도 헤어지자고 주장할 수 없는 시대, 소박(疏薄)이라는 말은 있어도 이혼이라는 단어자체가 없던 시대다. 거기다가 열녀(烈女)는 불경이부(不更二夫)라 하여 딸 키우는 양갓집에서는 딸 교육의 첫째 덕목(德目)으로 남편을 위하여 열녀(烈女)가 되라고 가르쳤다. 딸자식이 열녀가 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여 남자의 속물이 되도록 가르쳤다. 거기다가 여자에게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참으로 나쁜 악법(惡法)이 있었다. 시집 온 여자를 쫓아내는 법이다. 여자의 본능인 질투를 해도 쫓겨나고, 남편의 탓일 수도 있는 불임이 돼도 여자가 쫓겨나고, 정말로 여권(女權)은 없는 시대다. 눈앞에 있는 저 노부부(老夫婦)를 보면서 그 시대의 표본을 보는 듯 하고, 남편은 하늘이라고 받들던 시대가 현실로 보는 듯하다.
부인이 옆에서 상냥스럽게 뭐라고 말을 걸어도 안 들리는지, 못 들은 척하는 것인지 전혀 표정이 없으니 옆에서 보기가 답답하고 민망스럽다.
그 순간 행상(行商)이 와서 뭘 사라고 하니까 부인이 하나 사 달라고 했는지 뒷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내미는 것을 보아서는 부인한테는 용돈도 안주는 모양 이다. 그래도 밝은 얼굴로 대하는 것을 보니, 이 시대에 아직도 저런 ‘바보 천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여자노인은 자식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고 평생 고생하다가 자식들 장가 시집 다 보내고 나면 영감만 남는다. 영감만 없으면 책임도 의무도 다 벗어 날 수가 있다. 자식들과 남편한테 평생 종살이 하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황혼 이혼이 자꾸만 늘어난다는데 저 노인은 무엇으로 부인을 붙들어 매 놓았길래 용돈도 안 주면서 겁도 없이 저렇게 당당할까, 괜히 조마조마하고 걱정이 된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아 보이니 나와 세대 차이에서 오는 현상이니 큰 문제 삼지 말고 걱정은 걷어 들이는 것이 현명한 노릇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국 상류 사회에서는 부인을 ‘my better half’라고 하고, 유태민족은 그들의 생활의 지침서인 탈무드에서 “나이 먹어서 젊을 때 만나 지금까지 살아온 늙은 마누라는 이 세상 어떠한 보물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부인을 부속(附屬)물로 생각하던 가부장제가 몸에 배인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지 안타까운 생각을 피할 수 없다.
2014년 5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