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한 심정으로 살아온 지난 42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늦게나마「의령4·26위령탑」을 건립하여 해원(解冤)의 의미를 더하고, 아울러 이 공간이 희생자와 유족, 군민들에게 치유의 공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의령4·26위령탑 건립 취지문 일부>
오는 4월 26일 역사적인 ‘의령4·26추모공원’ 첫 위령제를 목전에 두고「의령4·26위령탑」이 그 모습을 마침내 드러냈다.
지난 4월 7일 오후 기자는 ‘의령4·26추모공원’ 조성 현장을 찾았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바닥 판석을 운반하는 작업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조형물 조립은 끝난 상태였다. 앞서 지난 2023년 11월 10일 공개된 조감도대로 높이 426㎝, 두 손과 하얀 새로 표현된 조형물이 드러났다. ‘두 손’ 부분은 황금색으로 표현돼 ‘하이라이트’인지 가려져 이날 현장에서 실물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뒤 위령탑을 떠받쳐 감싸는 벽면에는 왼쪽부터 건립 취지문, 희생 사망자(56명) 부상자(34명) 등 90명의 이름, 사건의 경위 등이 적혀 있었다. 투명 비닐로 싸여 그 내용을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령탑 주변 정비, 이 위령탑 주변 구간 바닥 판석 깔기, 그 바닥 판석에 이어진 부분부터 ‘의령4·26추모공원’ 진입로인 봉황교(길이 46m, 너비 6m)까지 이르는 구간 보도 블럭 깔기, 또 이에 더하여 봉황교 옆 인도교(길이 52m 너비 3m 공사기간 2월 6일∼4월 30일) 가설 등의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 공사 관계자는 그동안 잦은 비 소식 등 궂은 날씨로 어려움도 없지는 않았지만 ‘의령4·26추모공원’ 첫 위령제 행사에는 차질이 없도록 공기에 맞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확인된 건립 취지문에는 “의령군 궁류면에서 총기사건이 일어난 지 42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 세월 유족들의 간절한 염원과 의령군 오태완 군수의 의지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도움으로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일원에「의령4·26위령탑」을 건립하게 되었다”라며 “위령탑은 석재 벽으로 둘러싸인 모양에 하얀 새를 두 손으로 날려 보내는 형상으로, ‘하얀 새’는 희생자들의 넋을 좋은 곳으로 날려 보낸다는 의미이고, ‘두 손’은 희생자들의 넋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유족들의 간절함으로 오랜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석재 탑 최하단의 기단 길이와 탑신의 1단 높이를 각각 4.26m로 설치하여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를 더했고, 3단으로 확장되는 탑신의 형상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간절함을 표현하였다”라고 적었다.
이 사건의 경위와 관련하여 “1982년 4월 26일 저녁부터 4월 27일 새벽까지 궁류면 4개 마을인 석정, 압곡2구, 운계1구, 평촌마을에서 벌어진 참사는 의령경찰서 궁류지서 우범곤 순경의 무모한 만행으로 일어났다. 우범곤 순경이 동거인과 말다툼을 벌인 뒤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2자루와 실탄, 수류탄을 탈취한 후 총기를 난사하여 사망 56명, 부상 34명 총 90명의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외부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유일하게 통신시설이 있던 궁류우체국에 들어가 전화교환원과 집배원을 사살했고, 4개 마을을 돌며 불이 켜진 집이나 사람이 모인 집에는 어김없이 들어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총을 난사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다음 날 새벽 평촌마을에서 우범곤이 인질로 잡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하면서 끝이 났다. 이 희대의 사건에서 공권력은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당시 경찰은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만, 진압에 소극적이었으며 당시 정권은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언론보도를 통제하며 사건을 지워나갔고, 유족들의 슬픔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 갔다.”라도 적었다.
한편, 의령4·26추모공원 조성사업 추진위원회는 오태완 군수를 위원장으로 부위원장에 류영환, 하만용 유족위원으로 류경대 배병순 손태열 이현호 전병태 전원배 전종철 전혜선 허기찬, 위원으로 강창한 김갑철 김원연 문미경 박상출 성수현 양민용 윤병열 전시수 전용부 전임수 최용길 최우석 허둘이 황성철 등으로 구성되었다. 전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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