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州姜氏 宜寧 入鄕祖에 대한 小考
宜寧 入鄕祖 淸風郡守公 詳系
관리자 기자 / 입력 : 2005년 02월 16일
진주강씨 시조(始祖) 강이식(姜以式) 장군은 고구려 구국공신 병마도원수이시고 파조 1세 박사공은 원종15년(1274)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국에 갔을 때 아드님 인문(引文)께서 종행하게 하셨는데 환국 후 벼슬을 그만 두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피봉(被封)되시어 품계는 정일품이시다. 파조 2세 급사공 인문(給士公 引文)은 전중성 내급사란 벼슬로 고려시대(1281) 왕실 보첩(譜牒)을 맡아보던 관청(정원 1명)에서 일했다. 급사공은 중국 원(元)나라가 1281년 일본을 원정할 때 길을 잘 안다고 하여 아버님과 같이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으로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여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절대 벼슬길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 파조 3세 어사공 사첨(師瞻)은 고려 충열왕 때 전중 감찰어사로 민심을 수습하는 막중한 직위를 맡았다. 파조 4세 진원부원군 창귀(昌貴)는 중대광 문하시중의 직위를 부여받고 진원부원군에 봉하셨고 품계는 정일품이시다. 파조 5세 문경공 군보(君寶)는 직위가 삼중대광 문하좌시중이었으며 정일품으로 봉산군에 피봉, 우왕 6년(1380) 서거 후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하사 받으셨다. 파조 6세 양진당 시(蓍)는 삼중대광(三重大匡) 정일품으로 상의문하찬성사(商議門下贊成事)를 역임했으며 시호(諡號) `공목(恭穆)``을 하사 받았다. 파조 7세(필자의 17대조) 통계공(通溪公) 회중(淮仲)은 고려문신으로 직위가 보문각 대제학으로 일찍이 최영 장군 등과 함께 탐라(제주도)를 토평했으며 공양왕의 주석지신(柱石之臣)이었다. 공은 조선조 태종이 형조참판, 병조참판, 병조판서와 세종이 도총제로 등용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이군불사(二君不事)``로 충절지신의 마음을 지켰다. 특히 공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등극하자 그 부당성을 성토하는 동지들과 두문동에 들어가 합세하여 다시 안약, 김준, 전조생, 이숭인, 박태검 등 동지와 경기도 고양군 고봉산 기슭 배록동으로 옮겨 최후까지 변절하지 않으시고 두문불출로 여생을 마감(1421)했으니 그 강직한 충절은 천만고에 빛나고 있다. |
관리자 기자 /  입력 : 2005년 0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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