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오윤부 선생님. ⓒ 의령신문 |
| 오윤부 선생님(사진)은 거창군 신원면 청순리에서 1915년 9월 9일 출생하시고, 본적은 의령군 가례면 대천리 358번지이고, 주소는 대천리 319-2번지이다. 부 오성복옹, 모 정명순님 슬하에서 1남으로 출생하시었다.
오윤부 선생님은 1남 6녀를 두셨다. 본가는 대천리 319-2번지로서 집안 대대로 가례면 대천리에서 살았다. 1958년 5월에 준공한 기와집에서 거주하셨고 지금은 박경섭(77) 씨가 살고 있다. 부모에 대한 효도가 극진하시고 마을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시었다. 신학문으로 한국신학교를 졸업하시고, 경남청년단장을 역임하셨다. 엄격한 성품을 함양하여 타고난 성품이 곧았다. 청빈하게 사는 삶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호연의 인생철학이 배어 있는 분이셨고 실천하고 닦은 공도 많았습니다.
공적은 1946∼1947년경에 의령에 콜레라
가 만연할 당시에 의사가 아니면서도 자기에게 전염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들을 자기 집에 데려와 따뜻한 물을 먹이고 하여 낫게 해 주변에 감명을 주었습니다. 진주 촉석루가 6·25 때 불타고 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에서 복원 할 당시 부감독으로 임명받아 성실히 수행하였다고 진주시청 기록에 전합니다.
의병탑 건립에 기여하셨습니다. 당시 고적보존회 회원으로 참여하였던 오윤부 선생님은 의병기념사업의 당위성을 의령군민은 물론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 관계 관청에 진정하여 1971년 의병기념사업회(위원장 김현택)을 조직 결성하였다.
군내의 초·중·고등 학생들과 군민들을 비롯하여 경향 각지의 향우들의 성금으로 첫 사업인 ‘의병탑’을 1971년 1월 15일 착공하여 4월 22일에 준공되었음은 탑신에 잘 나타나 있다. 탑의 모양은 의령중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하던 정모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17장령을 의미하는 18개 옥구슬 고리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 ‘의병탑’으로 제작 되었다고 전하여진다.
그 후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령읍)을 2회에 걸쳐 역임하면서 1972년 4월 22일 ‘의병의 날’로 제정하고 의병제전위원회(위원장 권수기)를 결성하고 기념행사를 거행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임진 창의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충익사 건립, 유물전시관 건립 등 성역화사업을 박정희 대통령과 국회, 중앙 요로에 진정하는 전도사 역할을 일념으로 담당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애향심의 발로에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사업뿐 아니라 구상하던 자굴산 개발, 남강변에 연결하는 의병전승기념도로건설 등의 선견지명이 현실화 되었다. 항상 소탈하고 긍정적인 인간성을 지켜본 후배의 한 사람으로 문화원과 지역사회에서 응분의 예우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는 바이다. 의령군에서는 선생님의 공적비라도 세우는 방안을 검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988년 3월 15일 선생님은 서울에서 운명하셨고, 강원도 묵막 공동묘지에서 잠시 영면하시다가 그 후 손자 오창세(67)가 2013년 11월 1일 청주 목련납골당으로 이장하여 모셨다고 합니다. 서울 자택이 화재로 소실되어 기록과 사진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
 |
|
장산 신경환
(경남향토사 이사, 의령지회장) |
ⓒ 의령신문 |
| 의령고려병원도 건립하셨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서광아파트가 들어섰지요. 그리고 “신 주사 문화원을 한번 만들어보렴” 말씀하시기에 “네 만들겠습니다.”하고 1977년 자료를 준비하여 1978년 경남도에 비영리법인으로 의령문화원 설립을 신청한 바 1981년 1월 13일 의령문화원이 설립 되었습니다. 의령문화원의 초석을 놓은 분이 초대문화원장 오윤부님이시다. 임기는 1981년 1월 13일부터 1985년 1월 12일까지인데, 의령에 대한 애향심과 문화 창달을 위하여 결의에 찬 활동으로 설립된 의령문화원은 그 분의 열정과 애향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차근차근 기반을 닦아 나아가게 되었고 의령지역에 여러 큰 사업을 많이 추진하였으니 군민들의 칭송이 큽니다. 의령문화원 당면 업무와 사업계획을 추진하시면서 1982년도에 의병제전 행사 중 문화행사로서 제1의 영남시조경창대회 개최 그리고 옛 가야의 악성 우륵의 출생지인 부림면 대상으로 연구 조사를 하는 사업이었다. 그러다가 1981년 말 오윤부 원장님의 개인 사정으로 업무를 그만 두시고 사무실 열쇠를 박희성 씨에게 맡기시고 홀연히 고향을 떠나셨다. 그렇게 애향심이 남다르시던 분이 아쉽고 안타까웠다. 앞으로 오윤부 선생님을 기리기 위해서 군민의 이름으로 공적비 세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