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想文)
친구와 벗
박재호(전 군민신문 회장)
남부지방에는 호우주의보가 내리고 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올해 4월 28일 밤 아홉시 경에 모바일로 제법 긴 문자가 들어왔다. “저는 강G씨의 딸입니다. 며칠 전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아버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님 친구 분들로 보이는 전화번호 수첩이 발견되어 늦게나마 소식을 전합니다. 망인의 명복을 빌어주십시오.”라는 비보였다.
망인이 된 친구는 초등학교시절 우등생이었고 단거리 육상선수였으며, 염소 몇 마리를 키우며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 속에서도 타고난 재질이 뛰어나 붓글씨를 잘 쓰면서 수채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적한 시골의 초가나 교회의 십자가 위에 함박눈이 내리는 정경을 직접 그려 주곤 하면서 동기생들에게 감성을 일깨워주는 다재다능하고 정이 많은 친구였다.
30대 후반에 홀로된 이 친구는 슬하에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고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살아오다가 2011년 봄에 신장암 말기, 간암 초기진단을 받고 여러 차례의 암 수술을 받고도 정신력 하나로 이겨낸 의지의 사나이였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중에도 지난해 5월의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여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었음에도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영면한 것이다.
암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있는 친구를 세 번째 문병하러 갔던 날 단 둘이 마주한 병실에서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친구야, 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강 하나를 밑천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수십 년을 봉고차를 집 인양 의지하여 차 안에서 숙식을 하며 그 차에 상품을 싣고 떠돌이 장사를 하면서 가정을 꾸렸고, 아이 둘을 대학까지 졸업시키느라 옆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살았다. 주말에만 집에 들려 휴식을 하고 월요일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하루도 빠짐없이 7번 국도를 오르내리며 장사를 해 모았던 돈으로 어렵사리 마련했던 아파트 한 채가 내가 모은 유일한 재산이었다. 수년 전부터 건강에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지만 병원 한 번 가볼 여유도 없이 살았다. 그런데 내가 병원에 몇 달 있는 동안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아들놈이 집을 팔아 어디론가 가고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외간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딸의 도움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라는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가정사 이야기였다. 그리고 친구는 “몇몇 친구들이 문병 와서 주고 가는 5만 원, 10만 원을 간병인 인건비에 보태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병원비를 부담하고 있는 사위에게 다소나마 체면도 서고…”라고 했다.
친구의 슬픈 가정사 이야기로 지금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병마보다도 더 가슴 아프고 말 못할 삶의 내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무덤까지 안고가야 하는 비밀스러운 상처 하나쯤은 간직한 채 살아가는가보다 싶었다.
친구는 1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내가 가끔 힘들 때 불쑥 찾아가면 낙산사, 경포대, 성류굴 근처나 삼사공원, 감포 바닷가, 정자해변 등의 7번국도 그 어디에선가 변함없는 우정으로 나를 맞이하여 밤을 지새우며 술잔을 나누기도 했건만 둘은 단 한 번도 자기 일신이나 가정사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아픔을 위무하며 함께 있을 수 있었던 죽마고우였다.
이 친구가 자기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아버지로서 희생한 일생은 결국 병마와 빈곤밖에 남지 않은 허망함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어떤 책에서 읽었던 “운명의 신은 사람에게 마치 흡혈귀처럼 찰싹 달라붙어 꿈을 빨아먹고 희망을 난도질 하는 것을 즐기는 속성을 지닌 것 같다.”라고 했던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빈곤과 병마로 고통 받고 있는 친구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지도 못한 것은 물론 언제 영면하였는지도 모르는 채 친구의 딸이 장례를 치른 후 전해 온 비보를 접하면서 친구란 과연 어떤 사람을 일컫는 말인가를 돌이켜보는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공모한 ‘친구’의 정의는, “첫째 ;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찾아오는 사람. 둘째 ; 기쁨은 곱해주고 고통은 나누어 갖는 사람. 셋째 ;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넷째 ; 언제나 정확한 시간을 지키고 절대로 멈추지 않는 시계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나는 외롭게 이승을 따나는 친구의 곁을 지키지도 못했으니 그 흔하디흔한 벗에 지나지 않았다는 자책으로 가슴이 아파왔다.
경제적으로 곤궁한 처지에 놓이거나 회복이 불가능한 암과 같은 업병으로 투병하게 되면 술과 밥을 나누며 어울리던 그 많던 동창생이며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찾기 어려운 것이 범부로 사는 우리네 모습이고 인간사다〔酒食兄弟 千個有, 急難之朋 一個無〕. 그러므로 처지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우정을 지키는 사람은 친구고, 어려워진 친구를 외면하고 멀어져 가는 사람은 벗일 뿐이다.
벗은 비슷한 나이에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되지만 늘 가까이하여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이나 자연, 취미생활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므로 주어진 삶의 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고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우면 언제 멀리하더라도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영면한 친구는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어떤 말 못할 사연으로 부인과 이별하고 홀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직 생계유지와 자식 뒷바라지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유년기에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어찌 그리도 인덕이 없고 박복한 삶을 이어올 수밖에 없었던 지를 짚어보면 제각기 전개된 상황이 다를 뿐 친구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친구가 늘 소중히 간직하고 다니는 거울(꿈·희망)이 있었는데 길을 가던 중에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 온 돌멩이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면서 비포장 자갈길에 흩어졌다면 스스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겠지만 다시 주워 담았다 한들 원형의 모습을 되살릴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이렇듯이 친구는 자기 의지(꿈·희망)대로 살아지지 않는 어떤 운명의 길 없는 길을 따라 살다 갔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친구는 불가에서 말하는 업연(業緣) 중에 ‘증상연(增上緣), 즉 어떤 법 또는 작용이 일어날 때 영향을 주는 주위의 조건’이 나쁜 연(緣)으로 닿아 고해(苦海)의 파고(波高)와 싸우며 이승을 살다 갔다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는 연유다.
홀연히 이승을 떠난 친구의 극락왕생을 축원 드리면서 나는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친구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적막한 밤이 되었다.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