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지만 ‘경주 최 부잣집’이 논을 사면 박수를 쳤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주 최 부잣집은 오늘날 ‘정재(淨財)’의 상징물로 회자(膾炙)되고 있다. 실로 이 집안은 9대를 내려오는 동안 진사 벼슬을 하고, 12대 동안 만석꾼을 지낸 집으로 팔도에서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하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富不三代)”란 말이 있지만 이와는 달리 최 부잣집이 오랜 세월 부와 명예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그 집안 나름의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집에는 대대로 가훈처럼 지켜온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라.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주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같은 여섯 가지 제가의 철학과 함께 육연(六然)이라고 하는 수신의 철학이 있었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낸다)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한다)이 그것이다.
최 부잣집은 경주 교동 69번지에 있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도 교동 69번지는 특별한 장소다. 설화에 의하면 원래 이 터에는 신라 문무왕의 딸이자 무열왕의 둘째 누이인 요석공주(瑤石公主)가 살던 요석궁이 있었다고 한다.
최 부잣집이 이곳에 자리 잡은 때는 대략 200년 전. 그러니까 현재 장손인 최염씨의 7대조가 되는 최언경(1743-1804)대의 일이다. 그 전에는 경주시 내남면의 '게무덤'이라 불리는 곳에 살았다고 한다.
여기서 최 부잣집의 파시조이자 13대조인 최진립(1568-1636)이 살았고, 아들 손자대로 내려가면서 점차 재산이 쌓였다. 재산이 늘어남에 따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새로운 터를 물색했는데, 그 때 택지한 곳이 오늘의 이 집터이다.
최 부잣집의 마지막 부자는 현재의 장손인 최염(74·최치원의 28세) 씨의 조부인 문파(汶坡) 최준(崔浚, 1884-1970). 일제식민지시대를 살았던 그는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와 백산상회를 설립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다가 부도로 가산탕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문파는 해방 후 모든 재산을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는데 희사했다. 수백정보의 논밭과 8000여 권의 장서를 내놓았고 계림학숙(鷄林學塾)을 설립하는 데 남은 재산을 희사했다.
최 부잣집은 원래 아흔 아홉 칸이나 됐고, 부지 2천여평에 1만여평의 후원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1970년의 화재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소실되는 바람에 30여 칸만 남아 있다. 때마침 경주시가 지난해 11월28일 5억3천만원을 들여 화재로 소실된 최 부잣집 사랑채 한 채를 복원한데 이어 올해에도 추가로 나머지 사랑채를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 집안의 정재(淨財)와 명부(名富)사상을 길이 계승·발전시키려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올해에는 모든 사람들이 황금돼지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되데 졸부가 아닌 최 부잣집과 같은 명부(名富)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길 기원해본다.
최학열
(경주최씨 대구화수회 회장 / 재대구 의령군향우회 고문, 봉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