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일제에 희생된 의령출신 여압문씨의 연고자를 찾는다는 기사<본보 제137호(7월8일) 7면 보도>와 관련, 지난 53년 이전 의령읍 지역의 호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데다 연고자나 지인도 한달째 나타나지 않는 등 여압문씨의 신원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2일 의령읍 오세용 계장과 의령경찰서에서 발간한 “의령경찰의 발자취”에 따르면 53년 11월23일 지리산 빨치산 이영희 부대가 퇴각하면서 의령면사무소에 난입하여 기물을 탈취하고 방화하는 과정에서 의령면의 호적부도 이때 소실돼 53년 이전 의령읍 호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의 전산망 호적 기록은 54년 12월20일 이후의 것이기 때문에 호적 전산망에 나타나지 않으면 여씨의 신원을 확인할 길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앞서 의령신문은 지난 7월8일 일본 이름은 삼산압문(三山壓文), 옛날 주소는 의령군 의령면 상리 77, 가족이름은 순자(順子)라고 하는 사람의 연고자를 찾는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한달 가까이 되도록 여압문씨를 찾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기자는 2일 상리 77번지는 지금의 산다 부락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남철주(57) 이장을 만나 여압문씨의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남 이장은 기자의 부탁을 받고 “해당 지역과 인근 어르신에게 수소문했으나 끝내 여압문씨의 연고자나 지인을 찾을 수 없었다”고 이날 밤 8시30분께 기자에게 전했다.
오세용 계장은 “이름과 본적을 다르게 알고 있을 경우 호적 전산망을 통해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다”며 “호적 전산망에 없고 연고자나 지인도 나타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 연고가 없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재일동포 김창진씨는 2일 기자와의 국제전화에서 “지난 6월부터 지역신문 등을 통해 연고자를 찾는 운동을 벌인 결과 현재 여수에서 2명, 거제에서 1명 등 모두 3명의 친족이 나타났다”며 “의령신문을 비롯해 경남 한산신문, 경남신문, 모닝뉴스, 전남 여수신문 등이 보도에 적극 동참한 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며 더 많은 지방 신문의 동참을 바란다”고 말했다.
유골 반환과 관련, 재일동포 김창진씨는 “주일 한국대사관의 정무과장을 만나서 이 문제를 논의했더니 서울에 `일제강점하강제징집진상규명위원회'와 의논하는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들었다”며 “자세한 내용을 1일 진상규명위원회로 연락했지만 현재까지 회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고 덧붙였다. <유종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