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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의 영웅들, 광복을 준비한 세 한글학자

정영만(한국자유총연맹 대구시지부 고문·전국 의령군 향우연합회 고문)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8월 24일
▶지난 7월 9일 의령읍 서동행정타운에 ‘의령한글공원’을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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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우리말 사용조차 억압받던 일제강점기 전국의 말을 모아 사전을 만들려 했던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영화 속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의 모델로 알려진 사람이 경남 의령 출신의 한글학자 고루 이극로 선생이다.

그러나 의령에는 이극로 선생과 함께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데 힘쓴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남저 이우식 선생과 한뫼 안호상 선생이다. 세 사람은 학자와 후원자, 교육자로서 맡은 역할은 달랐지만 나라를 잃은 시대에 민족의 말과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어져 있었다.

일제는 식민지배가 깊어질수록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어학회는 우리말 사전 편찬에 나섰으며 한글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어와 외래어 표기법을 정리했다. 이는 단순한 학술사업이 아니었다. 우리말을 지켜 민족의식과 정체성을 보존하고 언젠가 되찾을 나라의 정신적 기반을 준비한 문화 독립운동이었다.

이극로 선생은 그 중심에서 사전 편찬과 어문 규범 정비를 이끌었다.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을 맡았고 한글맞춤법 제정과 표준어 사정에 참여했으며 조선어학회 간사장과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전국에서 사용하던 말을 모아 그 뜻을 밝히고 한 권의 사전에 담는 일은 우리 민족이 살아온 흔적과 생각을 보존하는 작업이었다.

이우식 선생은 이 거대한 사업이 계속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는 1919년 의령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이후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과 회장을 맡았으며 사전 편찬과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발행에 필요한 자금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학자들이 우리말을 연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신의 재산을 민족의 미래를 위해 내놓은 후원자의 헌신이 있었다.

철학자이자 교육자로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 선생은 조선어사전 편찬과 한글 교육 발전에 힘을 보탰다. 우리말이 가정과 일상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교육과 학문, 국가 운영의 언어로 자리 잡으려면 각 분야의 생각과 지식을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그의 활동 역시 광복된 나라에서 국민이 자신의 언어로 배우고 생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일제는 이들의 활동을 단순한 사전 편찬으로 보지 않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과 후원자들을 대거 검거해 편찬 사업을 중단시켰다. 이극로 선생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아 함흥형무소에 갇혔고 이우식 선생도 체포돼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말과 글을 연구하고 후원한 사람들까지 탄압했다는 사실은 일제 또한 언어가 민족의식과 주권의 토대임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극로 선생은 옥중에서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광복 후 사라졌던 한글 사전 원고도 1945년 9월 경성역 창고에서 되찾았다. 이를 바탕으로 편찬 작업이 재개됐고 1947년 마침내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이 세상에 나왔다. 오랜 탄압과 옥고 속에서도 지켜낸 우리말이 광복된 조국의 사전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세 사람의 고향인 의령군에서는 이들의 업적과 우리말을 지킨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7월 9일 의령읍 서동행정타운에 ‘의령한글공원’을 준공했다. (사진)9천881㎡ 규모의 공원에는 이우식·이극로·안호상 세 선생의 동상과 업적 안내판, 한글 조형물 등이 마련돼 우리말을 지킨 이들의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있다.

의령은 예부터 나라와 시대가 필요로 하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고장이다.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망우당 곽재우 장군, 민족교육과 민족자본 육성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한 축을 이끈 호암 이병철 회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걸어간 길은 서로 달랐지만 자신의 시대가 요구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하나로 이어진다.

여기에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세 한글학자의 발자취까지 더해진다는 것은 의령군민에게 큰 자부심인 동시에 소중한 유산을 후대에 제대로 전해야 할 책임이기도 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앞장서고, 나라를 잃었을 때 독립을 준비하며, 새로운 시대에는 산업과 교육·문화의 터전을 닦아온 선현들의 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광복은 빼앗긴 영토와 주권을 되찾은 날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독립은 국기와 국경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민이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배우며 역사를 기록할 수 있어야 민족의 정신도 이어질 수 있다. 굳건한 국방이 나라의 울타리를 지킨다면 말과 글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국민의 정신과 정체성을 지킨다.

이번 광복절에는 총칼이 아닌 사전과 교육, 재산과 학문으로 독립을 준비했던 이들도 함께 기억하자. 의령의 세 한글학자가 지켜낸 것은 우리 민족이 우리답게 살아갈 권리였다. 우리가 오늘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한글로 말하고 배우며 기록할 수 있는 일상은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의령한글공원에 나란히 세워진 세 선생의 모습은 한 사람의 학문과 한 사람의 후원 그리고 교육을 향한 뜻이 모여 민족의 말을 지켜냈음을 보여준다. 이미 세계가 주목하고 배우고자 하는 우리 한글을 지켜낸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우리의 언어와 정신을 다음 세대에 온전히 물려주는 것 또한 광복의 의미를 이어가는 길일 것이다.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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