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즐겨야 힘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정작 노동을 하는 사람은 즐기는 수준이 어디까지여야 하는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두 시간 노동으로 땀 흘리는 것은 즐거울 수 있다. 개운할 수도 있다. 강도 높은 운동을 하고 땀 쭉 뺐을 때의 기분과 같다. 하지만 온종일 중노동에 시달려보라. 노동을 즐기라는 말이 얼마나 어불성설인지. 즐기는 시간이 지나면 인내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노동이다.
“아이고, 되라. 꾀사리가 말라꼬 이리 많이 올라왔시꼬. 쪼맨만 올라오지. 심들어 죽것다.”
오후 세 시가 넘어가자 일흔 여섯 살의 세 할머니의 걸음걸이는 눈에 뜨일 만큼 굼뜨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오금이 펴이지 않는 것은 고사리 밭의 주인인 나도 마찬가지다. 후덥지근한 날씨까지 가세해서 다리가 천근같다. 그렇다고 ‘할매, 고마 하입시더.’란 말을 할 수도 없다. 놉이나 놉을 부리는 주인이나 정해진 일을 마무리해야 하루 일과가 끝나기 때문이다.
“아지매, 심들지예? 그래도 고사리 꺾을 게 많으니 저는 좋은데예. 인자 다 꺾어 갑니더. 쪼맨만 힘 내이소. 무거운게네 앞치마 불룩하게 차기 전에 자주 포대에 붓고 물도 좀 마시고 허리도 좀 펴면서 하이소.”
돈 주고 일을 시키는 입장이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친정어머니 같아서, 시어머니 같아서. 그나마 고사리를 꺾어주겠다고 나서주는 동네 할머니가 고마울 따름이다. 물론 할머니도 한 푼이라도 벌어 가용에 보태겠다는 마음으로 남의 일을 하러 오지만 힘에 부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년에는 꾀사리 꺾어 주로 오다 몬 하것소. 걷는 것도 심에 부치니 괜히 민폐만 끼치는 것 겉애서 미안시럽기도 하고.”
노동의 즐거움이 인내심을 시험하는 단계에 이르면 할머니는 내년을 걱정한다. 이런 기력으로 내년에도 살아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년에 자신이 이 세상에 없을 거라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오래오래 살기를 바란다. 백 살 노인이 아파 누워 있으면서도 자신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며 내년에 무슨 일을 할 것이며, 어디를 다녀오고 싶다는 말을 하는 세상이다. 노인이 죽음을 인정하기만큼 어려운 것이 농사짓는 일은 아닐까. 진짜 나도 걱정이다. 내년에도 고사리 농사는 지어야 하는데 놉 안 쓰고 남편과 둘이 하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가오지도 않은 내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재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미 흘러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를 반추해서 현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은 것이고, 현재를 알차게 엮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오늘을 알차게 살자. 남의 이목에 끌려 다니며 시간을 허비하지도 말고,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으로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거나 잊어 먹는 일은 없어야 인생을 알차게 사는 것이 아닐까. 내일도 나는 세 할머니를 모시고 고사리 밭을 누빌 것이다.
노동! 즐거움을 주는 시간도 인내심을 기르는 시간도 내 인생에서 소중한 발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