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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의령은

문남선(수필가)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04일











▲ 문남선
 이원수 선생님이 작사하신 ‘고향의 봄’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즐겨 부르는 국민가요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대부분 어린 시절의 아련하고 그리운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분이라면 고향이라는 단어에서 나라를 빼앗겨 불행했던 시절의 설움과 고통을, 6․25의 비극인 남북분단으로 혈육을 북에 두고 온 분은,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부모와 형제를 떠 올릴 것이다.


우리는 간혹 매스컴에서 외국으로 입양 간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자신의 뿌리를 알기 위해 TV에서 부모와 형제를 애타게 찾는 광경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자기의 탯자리를 찾아 먼 바다에서 설악의 남대천까지 알을 낳으러 오는, 과학적으로도 도저히 풀 수없는 연어의 불가사의한 행동과 비슷한 일이 아닐까.


경남 의령은, 내가 태어나 17살 때 서울의 여고로 진학하기 전까지 자랐던 곳이다. 내 유년 시절의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추억과, 35년 간 교사로 재직하셨던 어머니에 대한 진한 향수가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그곳엔 부모님의 산소가 있기에 지금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고향을 찾는다.


개나리와 벚꽃이 산야를 수놓던 4월의 휴일, 새벽에 서울을 출발해 부모님 산소를 찾았던 날 귀경길이었다. 달성군 구지라는 지역의 도로변에 위치한󰡐곽재우 장군 묘󰡑를 들렀다. 그곳을 지날 때면 한번 들리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지만, 그때마다 시간에 쫓겨 그냥 통과했는데 이번엔 시간적 여유도 좀 있고 해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거기엔 장군의 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군의 선조와 다른 의병들의 묘 수십 기가 섞여 있기에 안내문이 없었다면 장군의 묘를 찾기가 쉽지 않을 뻔했다. 장군의 공적을 미루어 크고 웅장한 묘를 상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봉분도 없는, 약간 볼록한 형체만 없었다면 평지나 다름없을 납작한 묘였다. 이는 장군께서 예장(禮葬)을 하지 말고 평장을 하라고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이라 한다.


어린 시절 천강 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은 기억으로는 내가 다닌 초등학교 근방의󰡐세간󰡑이라는 마을이 장군의 고향이라고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인구가 몇 명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장군 휘하에 2,000여 명의 의병을 있었다하니 그 엄청난 숫자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장군의 가슴 절절한 우국충정과 높은 덕망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그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장군을 따랐겠는가.


홍의 장군은 당대 퇴계 이황 선생과 대적할 정도로 학식이 높은 성리학자,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로서 과거 시험인 문과에도 합격하셨고, 각종 병서를 독파하여 학문과 병법 모두에 능한 분이셨다 한다.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고, 왜군에 밀려 관군마저 도주한 상황에서 신출귀몰한 게릴라전과 유격전으로, 소총까지 지닌 왜군과 대적하여 적을 물리치신 분이다. 그리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았으며,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그 유명한 김시민의󰡐진주대첩󰡑때 원군을 보내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를 하신 분이다. 그 당시󰡐바다에는 이순신 장군, 육지에는 홍의장군󰡑이라는 말이 유행했다는 것만 봐도 그 공적과 명성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나의 지식은, 조선 중기 임란이 일어났던 때에 붉은 비단옷을 입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왜군을 물리친 홍의장군이란 분이 계셨고, 오래전 드라마󰡐거부실록󰡑의 주인공인 독립 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이, 그리고 당대엔 삼성 그룹의 창업주 이병철이라는 거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천명을 훌쩍 넘겨버린 지금, 향우회와 재경 중학 동문회 등, 고향과 관련된 모임에 참석하면서 간접적으로 고향을 접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고향땅에서 살던 때보다 고향을 떠나온 지금이 더 고향과 끈끈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 같다. 이 부분은 12년 째 문학 활동을 해온 내 글 곳곳에서 고향의 정서와 냄새가 뿌리깊이 내려지고 흩어져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나는 17살 때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먼 이국땅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교포들처럼, 나 역시 가슴 한 쪽에 늘 고향을 담고 살고 있다. 그건 부모를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나지 못하는 운명처럼, 고향 역시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날 수없는 운명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운명은 또 다른 연결고리를 만들어, 현재 고향 소식과 향우들의 근황을 전국 곳곳에 전하는󰡐의령 신문󰡑현고수(懸鼓樹) 명상이라는 코너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는 일과도 연결되었다. 이러니 내 어찌 나의 탯자리인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산다고 해서 고향을 잊고 살 수가 있을까?


여고시절 480여 명의 동기생 중, 경상도 출신은 나와 울산친구 딱 두 명이었다. 그 당시 친구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철없던 나는 의령이라고 하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 같아서 마산이라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리고 세련된 서울말을 빨리 배우려고 노력했던 기억도 난다. 그리하면 내 고향이 감춰질 줄 알고.


하지만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가 없듯, 나 역시 내 고향과 내 고향 사투리에서 도저히 벗어 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 또한 초등, 중등 동기동창생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우리 부부는 늘 작은 향우회를 여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 경상도 사투리를 익숙하고 구수하게 사용하면서.


얼마 전 여고 동창들과 만났을 때 나의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말을 듣고 한 친구가 왜 사투리를 쓰냐고 물어 보았다. 여고 졸업 후 36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 고향은 경남 의령이라고.


그리고 내 고향 출신 인물 중 조선 중엽 임진왜란 시, 우리의 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지켰지만 육지를 지켜낸 분으로 문무에 뛰어나신 천강 홍의장군이 계셨노라고. 또 일제강점기엔 독립 운동가인 백산 안희제 선생이, 그리고 세계가 함께 움직이는 글로벌 시대인 지금, 우리나라 경제를 이끄는 선봉장으로 세계 속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삼성그룹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태어난 곳이라고, 내 고향 의령은 그런 곳이라고.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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