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의 애국심은 의령의 자랑이자 명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하니, 그의 휘하에 모인 군사가 1,0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牧使 곽월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하였고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의롭게 앞장섰다.
1592년 4월 히데요시는 중국 정벌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부산포와 동래를 수비하던 군사들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서양식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들의 공격 앞에 조선의 관군은 패전을 거듭하면서 쉽게 수도까지 함락 당했다. 국왕이 국경까지 몽진을 하는 치욕을 당하였지만, 의로운 민중들은 지방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의병 봉기를 일으켰다.
임진왜란 초기 육지에서는 의병들이 봉기하여 왜군을 공격하였고, 바다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이끌고 왜군을 괴멸시킨 쾌거를 이루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선교를 위해 활동하던 유럽의 선교사들 중에 스페인 국적의 세스뻬데스(Cespedes) 신부는 서구인으로서 최초로 1593년 조선 땅을 밟았고, 전쟁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이다. 신부와 그의 동료들은 당시 조선의 의병 활동과 거북선의 승리를 기록으로 남겼다. 필자가 스페인에서 유학을 하던 중 유럽의 도서관에서 직접 발굴한 우리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의령신문에 소개하는 것은, 마침 곽재우 장군을 기리는 의병제전의 주간에 큰 기쁨이다.
“꼬라이(당시 서양인은 한국을 ‘꼬라이’라고 호칭)인들은 결코 일본군에게 신하로서 굴복하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꼬라이의 여러 지역에 나뉘어 주둔하고 있었는데, 어떤 지역은 바다에서 매우 멀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오는 식량을 얻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보내야만 했다. 왜냐하면 운반 도중에 꼬라이인들이 그들을 습격하거나 살해하여, 그들이 운반하는 것을 빼앗기 때문이다(*의병들의 활동을 보여 준다). 또한 운반 거리가 무척 길기 때문에 내륙에 있는 일본군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으로부터 가져오는 상당량의 식량이 없어졌다.
꼬라이인들은 강력하고 거대한 배를(*거북선을 지칭한다) 타고 바다를 다니며 일본으로부터 오는 모든 배들을 괴멸시켰는데, 꼬라이인들은 적어도 바다에서는 일본군보다 더 훌륭한 장비와 재능을 가졌다. 그래서 꼬라이인들은 일본군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고, 이러한 일이 상당기간 계속 일어났다. 일본인은 바다에 관한 한 꼬라이인보다 기술이나 장비가 뒤떨어졌다.”
이러한 서양인의 기술에서도 보듯이 우리 의병들이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으로 일본군을 괴멸시킨 역사를 확인시켜 준다.
요즈음 의령에서는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의 얼을 기리고 의병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의병제전이 열리고 있다. 4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의령에는 호국의 정신이 숨쉬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