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장군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활약한 곽재우 장군을 일컫는다. 선조 25년(1592년) 4월13일 왜병이 부산진에 침입하여 서울로 향하자,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4월22일, 유생 곽재우는 가재를 털어 자기 집 종과 동네사람 10여명을 모아 마을 앞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장군은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는 작전으로 적을 물리쳤고, 또 정암진(鼎巖津)을 건너려는 왜병을 밤중에 늪으로 유인하여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 왜군의 호남진출을 차단하였으며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적의 화약 등 군수품 수송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의령에는 곳곳에 홍의장군의 기마도(騎馬圖)를 볼 수 있다. 의령군청 홈페이지 및 의령관문 벽면, 호국참전자유공비 앞 홍보탑, 대의고개 마루에 의령경찰서 안내판에도 볼 수 있다. 기마도를 알아보기 위하여 의령읍 중동리 소재 충익사를 찾았다. 충의문을 지나 전방에 보이는 기념관에 들렀다. 바위 위에 앞쪽 왼발을 들어올린 백마에 장군은 붉은 도포를 입고 허리에 노란색의 띠를 매었는데 한쪽 끝은 오른쪽 아래로 늘어져 있으며, 화살이 담긴 전통(箭桶)을 등 뒤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메고, 오른손에 지휘봉을 높이 들고 있는 그림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장군은 오른손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http://www.daum.net/통합검색-곽재우/사전․백과(브리태니커)」에는 앞쪽 오른발을 들고 있는 백마에 장군은 붉은 도포를 입고 노란색 허리띠는 한쪽 끝을 왼쪽 아래로 날리며, 화살이 담긴 전통을 등 뒤에 왼쪽 위로 메고, 지휘봉을 왼손에 들고 있다. 충익사 기마도와 비교하면 좌우가 바뀐 형상이다. 또 다른 검색사이트 「http://naver.com/곽재우/책-000선생님이 들려주는 곽재우)」에는 장군은 역시 백마를 타고 붉은 도포를 입었는데 왼손에는 칼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 이 그림에 의하면 장군은 왼손잡이라 할 수 있다.
홍의장군의 동상에 대하여 살펴보면, 대구 망우당 공원 내 ‘홍의장군 곽재우 선생 상’은 앞쪽 왼발을 살짝 들고 있는 말위에 장군은 오른손바닥을 앞으로 높이 들었고, 전통을 오른쪽 허리에 걸었으며, 장검과 활은 왼쪽 허리에 차고 있는 형상이다. 또 의령관내 2개 초등학교에서 홍의장군 동상을 볼 수 있는데 오른손에 칼을 들었거나, 오른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높이 들고 있다. 동상에 의하면 장군은 오른손잡이라 할 수 있다.
홍의장군은 우리에게 소중한 인물이다. 소중하기에 장군의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게 되며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존경하는 분과 동행할 때 그림자를 밟지 않는 것은 그림자와 실체는 일치한다는 데 기인하는 행동이 아닐까, 의령인은 홍의장군의 기마도에 한층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장군은 의령인의 긍지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익사 기마도는 표준이 되어야 하며 잘못 인용되고 있다면 시정 및 정정을 요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표준이 되는 홍의장군 기마도에는 칼과 활을 볼 수 없어 아쉽다. 물론 장군의 왼쪽 허리께에 칼과 활을 찼을 것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은 믿으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잘 믿으려 하지 않는 특성이 있지 않는가. 그리고 다양한 계층이 기마도를 볼 것이며 특히 상징적인 표현에 미숙한 학생들에게는 ‘홍의장군은 화살은 있는 데 활은 없고, 칼은 차지도 않았다!’로 인지될 수 있지 않을까. 각도를 약간 달리한 기마도를 제작하던지, 홀로그램 등을 이용한 입체적 영상으로 기마상을 제작하면 전시효과를 높일 수 있고 아쉬운 부분이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