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가 어디에서 살아가든 의령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바꿀 수가 없다. 아주 짧은 한 순간을 의령 땅에서 살았어도, 그는 의령 사람의 경력을 지니고 있음을 지울 수 없다. 짧은 기간을 의령에서 살았든, 긴 세월을 의령에서 살았든, 의령에서 살아간 사람은 누구나 의령과의 인연의 끈이 닿아 있다. 의령과의 인연의 끈이 닿은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더 좋은 의령이 되기를 소망할 것이다.
나는 나의 고향 의령이 지난날보다 더욱 살기 좋아지고, 인지도가 높아지고, 지역 위상이 향상되도록 애쓴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과 찬사를 보낸다.
그 가운데서도 의령 땅에 현실적으로 몸 붙여 거주하면서, 의령을 위해 애써 온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고마움과 찬사를 보낸다. 그들이야말로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고귀한 정신의 의령’을 미래의 ‘고귀한 정신의 의령’으로 구체적으로 이어 주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의령 땅을 지켜 살면서 의령을 위해 헌신적, 모범적으로 일해 온 사람들은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서도 의령문화원장을 지낸 허백영 님과, ‘의령신문’을 창간 운영해 온 박해헌 님의 의령 향토 사랑이 본보기로 크게 떠오른다.
허백영 님, 의령 향토 역사 찾기와 향토 문화 발굴 정리 집념
2004년도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은 허백영 님은 1972년부터 자굴산장학회를 설립 운영해 왔다. 1976년부터 백산 선생의 구국 정신을 계승하여 향토 출신의 인재 양성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백산육영회 발족과 운영을 비롯해 애국지사의 추모 기념 사업을 적극 추진해 왔다.
의령 군내 자연 마을 곳곳을 답사해 땅이름 유래, 유적 상황, 전설 및 구비 문학 등의 향토 역사 자료를 발굴 정리하고, 의령 향토사 연구회를 조직해 의령의 전통 민속 문화의 정리 작업을 했다. 1997년 1월부터 8년간 의령문화원장직에 있으면서 지역 문화 개발 보급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문화 예술 종합 정보지 ‘의령문화’를 연 2회씩 발행하고, ‘의령실록’ 등 의령에 관한 수많은 역사 자료를 집필하거나 발간하였다.
허백영 님은 의령의 유구한 향토 역사 찾기, 의령의 전통 문화의 발굴과 정리와 계승, 지역 청소년 육성 등 오로지 의령 향토 사랑의 집념과 실천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특히 의령역사의 뿌리를 찾고 의령 역사의 줄기를 세운 일은 의령의 정신을 살려 나가는 데 굳건한 버팀기둥이 될 것이다.
박해헌 님, 의령신문 창간 운영으로 지역 발전에 헌신
객지에서 유력 일간지의 기자, 편집국 간부, 사업국 간부, 논설위원 등을 지내면서, 언론 실무와 경영에 관해 능력과 경륜을 두루 쌓은 박해헌 님은 고향 의령으로 돌아와, 1999년 7월 ‘의령신문’을 창간하여 지금 한창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젊은 날 가끔 “의령에 지역 신문이 있어야 사람들이 서로 뜻을 교류하면서 진취적인 발전을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그 일을 박해헌 님이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해 내고 있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장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2003년 7월 ‘의령신문’ 창간 4돌 축시 ‘의령신문 복되리라’에서 ‘의령신문’에 대해 “푸른 칠월, 푸른 너른 하늘 / 팔 벌려 찬란히 꿈 펼쳐 섰는 / 우람한 나무”라고 했고, “한 그루 우람한 큰 나무 여기 있어 / 모두가 든든하고 모두가 미덥고 / 모두가 어두워도 깨어서 바른 빛의 길 간다. / 제대로 낙원의 길 일구어 살려 한다.”라고 했고, “뉴욕에서도 런던에서도 남태평양 시드니에서도 / 의령 유서 깊은 고을 인연 둔 수많은 사람들 / 고향서 불어오는 골짝골짝 이야기 향기 / 가슴 시원히 취하며 깊이 잠 들 수 있다.”라고도 했다.
나는 요즘은 다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9년 전에 ‘의령신문’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의령과의 인연의 끈이 닿은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생기 있게 참가하는 분위기를 바탕으로 의령이 지금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을까?”라고.
또 다시 먼 세월이 흐른 뒤에 ‘의령신문’ 대표 박해헌 님은 의령을 위해 더 높이 쌓은 공적으로 말미암아 많은 찬사를 받게 되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