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퇴원을 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 일 중에 가장 먼저 한 일이 피마자 잎을 삶아 햇볕에 내 너는 일이었습니다. 허리도 팔목과 손가락도 지끈거렸습니다. 사고 후유증이라는 것을 알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요.
교통사고는 삶과 죽음을 찰나에 갈라놓는 일이란 것을 실감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몸 고생, 마음고생, 돈 문제가 걸리기에 서로가 힘든 것이 교통사고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결정짓기 위해 눈치 보고, 자기 잘못 없다고 오리발 내밀고, 불쌍한 표정 지으며 좀 봐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인생사가 아닌가 싶더이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확률도 있었던 사고였지만 누군가 사고를 지켜봤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어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가해자 측에서 자신의 과실을 인정했지요. 나 역시 ‘죽으려면 당신 혼자 죽지 물귀신처럼 왜 남까지 끌어들이느냐’고 악에 바쳐 소리쳤던 마음이 다소나마 풀렸습니다.
가해자는 칠십 대의 시골 할아버지였습니다. 촌에 산다는 말을 듣는 순간, 노부부가 병원에 입원 하라 해도 막무가내로 집에서 몸져누워 있다는 말을 들으니 옹이 졌던 마음이 풀어져버렸습니다. 내 승용차보다 더 낡은 가해자의 트럭이 생각났습니다. 촌살림 아무리 알부자라 해도 싹 팔아봤자 도시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될 것을 뻔히 알기에 노인네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할까 싶어 보상금 가지고 흥정하는 일은 못하겠더군요.
“우리 영감 눈에 뭐가 씬 기라요.”
사고 직후, 함께 119 구급 차량에 실려 병원 응급실에 가 누웠을 때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빈말이 아닙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도 우리 민족의 정서겠지요. 육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동병상련을 느꼈습니다. 인정에 끌려 손해를 본다 해도 착한 본성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습니다.
보험회사에도 가해자 측의 합의에도 수월하게 도장 찍어 주었습니다. 나와 딸의 목숨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으니까요. 어디 부처님뿐이겠습니까. 조상님도 도와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승용차를 폐차 시킬 정도로 대형 사고였지만 딸과 내가 부러진 곳 없이 시퍼렇게 멍만 들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지요.
이번 사고를 겪으면서 인지상정이란 옛 어른의 말씀 새겨 봤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복을 짓는 일이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복을 짓는 일이란 것을. 복은 짓는 대로 거둔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며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추스를 생각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제 마음이 편하고 좋으면 사는 일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꾸만 인정이 메말라가고 돈이 행복의 잣대가 되는 세상이라지만 알고 보면 선한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네 보통 사람 속이 아닐까 싶습니다.
퇴원하면서 쪽빛 하늘을 봤습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삶이더군요.
따끈따끈한 햇살 아래 넉넉하게 말라가는 피마자 잎처럼 풍성한 가을빛을 기대하며 이 지면을 빌어 목격자 진술을 해 주신 이름 모르는 그 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