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씨 고향이 어디지? 경남 의령이요. 아∼ 총기 난동이 일어난 곳이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부정적인 우리 고향의 아픔이요!
내 고향은 곽재우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충절의 고장이요.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배우지 않았소?
전국의 경향 객지에 생활하고 있는 30여만 내외 군민 여러분!
내 고향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의령을 바로 알아야 나를 정확히 압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마을과 조상을 안다면 나의 뿌리를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저가 아는 고향 의령과 마을, 선조에 대한 작은 자랑을 감히 하오니 여러분께서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반향(班鄕)의 고장인 의령을 후세에 길이 빛낸 인물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천여명에 이르는 의병을 일으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며 왜적을 물리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 명종 7년∼광해군 9년)장군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언론·종교운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시킨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항일 애국지사와 남저 이우식(李祐植 1891∼1966) 민족운동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교육자 안호상(安浩相 1902∼1996) 철학박사,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업인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1910∼1987) 회장 외 많은 분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분들은 우리 의령을 역사에 전하면서 후손들에게 얼마나 높은 자긍심을 심어 주었습니까?
한편 해마다 개최되는 의병제전과 200년 역사의 큰줄당기기(기네스북 등재 : 2005.4.22), 전국 소싸움대회, 한우산 철쭉제와 패러글라이딩, 전국 자전거대회 등은 글로벌화 시대에 우리 의령인의 기백과 혈기를 알리는 김채용 군수의 21세기 현고수가 아닐까요?
저가 태어난 마을은 자굴산 서쪽에 기암괴석이 내려다보이는 의령군의 제일 오지(奧地)인 모의골 상촌인 대의면 신전리 곡소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의초등학교에 다녔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의령장날 짐짝 버스를 탄 기억이 난다. 의령시장에 도착하니 그 곳이 얼마나 도시인지 감탄한 적이 있다.
모의골 중촌마을에는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남인(南人)의 영수였던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 선조 28년∼숙종 8년) 선생의 영정을 모신 이의정(二宜亭)이 있는데 학문에 전념하는 한편 후학을 위한 강론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산이 좋고 물이 좋다는 뜻으로 지은 정자이다. 바로 위 행정마을에는 미수 선생이 심었다는 500년 정도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우람한 자태를 지금도 보이고 있다.
또 이의정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소와(素窩) 허찬((許瓚)의 유덕을 기리는 학고정(鶴皐亭)이라는 정사(精舍)가 있는데 시경에 학이 아홉 언덕에서 울었다는 말을 취한 것은 소와의 행실과 학문이 고고한 학에 비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마을 곡소에는 의령 옥씨(宜寧 玉氏)의 시조(始祖)인 옥진서(玉眞瑞)의 묘역과 사당인 경모재(景慕齋)가 있다. 시조 옥진서(玉眞瑞)는 고구려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파견된 8학사 중의 한 사람으로 의춘군(의령)에 봉해지고 의령에 살았다고 한다.
저의 뿌리로서 곡소마을에 입향한 선조는 임진왜란 때 합천 임란창의단에서 활약한 보옹(普翁) 이진문(李振文)의 손자인 합천이씨 21세손 학포(學圃) 월손(月孫 : 13대조)이다. 그리고 우리 문중의 가풍을 전하는 이씨(李氏) 3세(三世) 효열(孝烈) 비각(5대조 : 효자, 조모 : 열부, 당숙모 : 절부)은 우리마을 입구에 있다. 나의 근본은 선조이고 역대 선영(先塋)이 이곳에 있으므로 귀소본능의 정신으로 자주 찾아가고 정성을 다해 보살펴야 한다.
이상으로 내 고향 의령의 귀중함과 나를 알기 위해서 저의 작은 집안과 모의골, 의령고을의 역사와 전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우리 고향의 지나간 역사적인 사실들과 현재를 정확히 안다면 나를 아는 것이고 나의 능력을 미래지향적이고 적극적으로 발휘하여 내 고향 의령을 우리나라에서 우뚝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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