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詩會에서 남다른 언어감각 과시
春來千山和氣 一日人人作文
(봄이 찾아와 온 산에 평화로운 기가 넘치니 날마다 사람마다 글을 짓는구나)
잊힌 한글학자 이극로 박사는 그동안 너무 딱딱한 글들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었다. 의령신문은 이승재의 ‘시(詩)를 통해 본 이극로의 생애와 사상’을 4차례 연재하고자 한다. 그는 이극로 박사의 종증손자이자 현재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비교문학과 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의령신문은 이를 통해 친근한 ‘인간’ 이극로의 이미지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이극로 박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더욱 촉발시켜 지역의 큰 인물을 거듭나도록 조명하는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
시란 글쓴이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 장르다. 소설은 서사적이고 분석적이지만, 시는 본질적으로 서정적이며 압축적이다. 형식과 운율적 언어에 대한 이해 그리고 비유에 대한 감각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수필보다는 덜 자유적이지만 그러나 그런 점들 때문에 수필보다는 좀 더 예술적인 문학 장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글 독립운동가 이극로 (1893-1978)가 남긴 글들은 대부분이 논문과 논평이지만, 평생 동안 한글을 사랑하신 만큼 언어의 예술적 사용에도 관심이 많았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적지 않게 시들과 수필 그리고 노래가사(대종교 한얼 노래)들을 남기셨다. 그러나 시는 대략 10여편 밖에 남기기 않았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이극로의 문학적 성과를 논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고, 그동안 너무 딱딱한 글들로 이극로가 대중들에게 소개 되었던 감이 없지 않아 이번에는 한번 다른 관점에서 그를 소개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취지로 이글을 쓴다. 그래서 서두로서 격식을 차린 이극로의 소개는 생략한다. 그냥 여가 시간에 무심코 옆에 있는 책을 집어들고 읽듯 편안한 마음으로 이 글이 읽혀지기를 바란다. 물론 간헐적으로 쓰인 시들을 통해서 이극로의 생애를 총제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소개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이극로를 아는 사람 혹은 모르는 사람 모두에게나 그가 친근한 ‘인간’ 이극로의 이미지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극로의 인생의 시작은 그야 말로 척박한 공터에서 기적처럼 피어난 꽃이라고 해야 할까? 지방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서울에서는 개화당의 세력이 커져가는 혼란의 시대인 1893년, 전형적인 시골마을인 경남 의령 지정면 두곡리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세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맏형수와 서모 밑에서 자랐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막내로서 다섯 형님들을 잘 따르고 열심히 농사지으면 그만인 것이다. 형님들도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니고 공부를 못 했는데 막내가 감히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배울 수 없는 환경인만큼 배우고자 하는 욕망은 더 강했으리라. 남들이 점심 먹으러 간 틈을 이용해 서당에 몰래 들어가 쓰고 남은 종이를 이용해 글을 익혔다. 그리고 8살 때 시회(詩會)가 열렸을 때 사람들의 청에 즉석에서 ‘문(文)’자를 운으로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육언시(六言詩)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春來千山和氣 一日人人作文
(봄이 찾아와 온 산에 평화로운 기가 넘치니 날마다 사람마다 글을 짓는구나)
어깨 너머로 익힌 것을 바탕으로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행위를 연결하여 기승전결 구조로 절묘하게 육언시를 지어낸 것이다. 이듬에 열린 시회에서는 ‘방(方)’자를 운으로 하여 즉석에서 칠언구을 지었다.
芳草長岸詩四句 開花幽谷輿萬方
(‘길게 늘어선 언덕에 향기로운 풀’이라는 네 싯구는 깊은 산골에 만개한 꽃처럼 만방에 흥을 돋우는구나)
믿기지는 않지만 정말 어린 나이에 자연이 주는 환희를 알았던 것일까? 언어적 감각이 타고난 시의 천재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리저리 들은 풍월을 바탕으로 조합해서 만들어낸 시겠지만 그렇다고 시작(詩作)을 하는데 있어서 천재가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많은 외국 시인들 중 상당수가 이미 10세 이전에 기본 시작법을 완성한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타고난 언어적 감각 없이 이런 시를 즉석에서 만들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향후 이극로가 언어 연구에 일생을 바치게 되는 이유도 그러므로 그가 어릴 때부터 글을 배우겠다는 열정과 남달리 언어적 감각이 탁월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방초장안(芳草長岸)’이라는 시구의 출처는 알 수 없으나 ‘방초’란 말은 풀의 향긋한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한시에서 흔히 쓰였던 문구이다. ‘장안’은 길면서 낭떠러지 같은 다소 가파른 언덕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연에 대한 상상력이 수평적이자 동시에 수직적 공간으로 확대 된 것이다. 이렇게 상상속의 확대된 공간에서 퍼지는 풀의 향기는, 지금 이곳 두곡리의 깊은 산골에 만개한 향기로운 꽃들과 대구(對句)를 이룬다. 이런 언어가 자극하는 상상력의 세계와 눈으로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어찌 즐거움을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듬해 봄날엔 또 거문고 ‘금(琴)’자를 운으로 다음과 같은 칠언구를 지었는데 이것은 정말 어린 나이에 지은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백이나 두보가 지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그런 작품이다.
十里風景生時句 百年憂樂在書琴
(십리 풍경이 시를 만들어내고 백년의 근심과 기쁨이 책과 거문고를 있게 하는구나)
자서전 「고투 40년」에서 이극로는 이 시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좌중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라고 표현 했다. 이 시는 자연이 시를 있게 하고 인간의 희노애락은 책과 거문고를 있게 한다, 혹은 책은 인간이 고뇌했던 지(知)를 담아내고 있고 음악은 즐거움을 노래한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풍류와 인생의 깊이를 이해하고 이런 시를 지었다고 믿기는 어렵지만, 책의 중요함을 벌써 이 어린 나이에 깨달았던 것은 확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이 글은 향후 이극로가 일생을 바치게 될 학문에 대한 열정의 서곡(序曲)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시, 학문, 예(禮), 음악(音樂)의 조화는 공자가 논어에서 역설한 교육이념이다. 그 당시 서당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가르치지는 않았겠지만, 시와 책과 음악을 연결하는 시를 썼다는 것은 당시 이극로가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 정도는 충분히 잘 습득 하고 체화 했음을 보여준다.
이글에서 나오는 모든 시들은 이극로의 「고투40년」(범우사, 2008)에서 인용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