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의령군 봉수면 오산리이다. 한문으로 까마귀 오(烏)자와 뫼산(山)자를 쓰는 ‘오산’은 양지와 음지 두 마을이다. 한동안 동네 절반이 합천군에 속했다가 노태우 정권 때 의령군으로 편입되었다.
나는 1962년 2월 봉수국민학교 24회로 졸업했다. 그 당시 봉수면에 유일한 초등학교였고, 우리 옆집의 김명석, 유대석, 이경순이도 처음엔 합천군 대양면에 있는 대양국민학교에 다니다가 거리가 멀어 결국 중간에 우리 봉수국민학교로 전학 와서 졸업했다.
우리 세대, 즉 1945년 행방이후 6․25전쟁과 1953년 휴전 때까지 태어났거나 자란 아이들은 전쟁의 피폐와 음식부족 등으로 영양부족이 생겨 얼굴과 머리에 버짐 등이 번졌고, 누른 콧물줄기가 코 안팎을 들락거렸다. 장티푸스와 학질 등이 창궐하여 일찍 운명한 친구들도 많았다.
우리 학교는 한일합방 후 억압이 심했던 1933년 신현리 장유마을에 5년제의 봉수 보통학교로 개교하여 지금까지 약 3,400명의 동문을 배출하였다. 1회 선배부터 상당수 선․후배 동문이 운명을 하신 분들도 있다. 우리 동기는 48명 졸업했는데 현재 35명 생존하고, 나보다 3살 많은 친구도 같이 졸업하기도 했다.
정말 보릿고개 어려운 시절이었고, 도시락을 가지고 등교하는 학생도 없었고, 학교에서 급식도 물론 없었다. 오전 수업 끝나면 우물가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면 돌아가며 물배를 채우고 다시 오후반 수업 좀 듣고 3㎞가 넘는 시골길을 친구들과 자갈길을 걸어서 집으로 오는 것이다.
6․25 전쟁 직후라 선배들을 따라 나무 작대기 하나씩 들고 목총이라 생각하고 덩치 큰 친구가 “나를 따르라!”하면 약간 산 언덕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집으로 오기도 했다. 5학년 봄이 되면 학교 바로 뒷산에 올라가 연한 떡갈나무와 연한 가지들을 꺽어 새끼로 묶어지고 퇴비장으로 운반하면, 이것이 비나 이슬에 시들해진다. 몇 번 뒤집어주면 썩어 벼 심기 전 논에 뿌려, 비료로 사용했다. 비료가 없었으니 벼이삭도 크지 못해 수확도 적었다.
우리 학교 교무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오래된 관상용으로 아름다운 소나무 두 그루가 양쪽에 서 있었다. 찻길 옆 언덕위에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에 왕 벗 꽃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매년 봄이 되면 이 탐스런 벚꽃을 보며 보통 벚꽃보다 3~4배 큰 꽃과 연분홍색에 예쁘다며 꽃잎을 만져 보곤 했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붓글씨 습작했던 경험 때문에, 또 산골에서 농사짓고 나무하러다닌 덕분에 수필가가 되었다. 지난 4월에는 한국문인협회 회원(수필)이 되었다. 모두 봉수학교 다닌 덕분이라 감사한다.
학교 뒤편에는 합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688m의 국사봉(國師峰) 화강암이 서쪽을 향해 위용을 자랑한다. 맞은편의 조금 낮은 만경산이 봉수면을 둘러싸며 농사지을 물을 제공해주고 있다. 십 수 년 전 우리 모교는 서암리 공설운동장부지로 이전했다. 산업화이후 도시로의 이농현상으로 젊은이들은 생업과 자녀교육을 위해 시골을 떠났다. 작년에 모교 교장 선생님을 만나니 전교생이 17명이란다. 현실이지만 다시 귀농 자가 늘어나 최소 60여명 즉 한반에 10명의 학생은 유지해야 우리 모교가 존속할 듯하다. 우리 동문회도 모교 살리기에
뜻을 모아야 할 것 같다.
내년 지나면 모교는 개교 80주년이 된다. 학교지만 사람의 평균수명이다. 우리 형편에 알맞은 기념행사로 아래의 교가를 함께 부르며, 지나온 인생사도 나누고, 축구도 배구도 하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우뚝 선 국사봉은 우리의 기상, 삼천리 무궁화는 찬란도 하다. 아름다운 봉수학교 배운 그대로, 울리자 이 강산에 봉수교 종소리”
이 교가를 보는 동문들은 그 자리에서 한번 소리 크게 불러보며 우리 모두의 파이팅을 외쳐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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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대(鄭相大) 씨는
고향에서 봉수초등학교(24회)와 신반중학교(16회)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한양공고 기계과와 한양공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 ROTC 11기(기갑)로 군 복무를 마치고 연세대 경영대학원 MBA취득했으며, 안양과학대 조교수로 재직하다 미국 메릴랜드주립대학에 유학하여 경영학사(BS)를 취득한 후 주미대사관에 특채근무, LG그룹 사장 보좌역, 힐턴호텔에서 10년 이상 자영업 등으로 ‘Who's Who’ 인명사전(2007년)에 등재되기도 했으며, 2004년 워싱턴 문인회에 수필가로 등단했다.
그는 2년 전 25년여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지난해 10월에는 미국에서의 유학경험과 고된 이민생활, 미국인들과의 교제 등을 통해 체득한 느낌과 생각들을 진솔하게 기술한 자전적 에세이 “암소 탄 촌놈아!”(-미국 가서 양키한테 뭐 배우고 왔노-조선문학사)를 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