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我田引水에 대한 생각이다. 아전인수란 ‘내 논에 남의 논물을 끌어대기’ 라는 뜻으로 자기 형편에 좋도록, 자신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을 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이다.
꽃나무는 생존을 위한 최소공간만 확보하면 더 이상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행복을 위해 大地를 독점하는 따위의 투기는 하지 않는다. 풀꽃과 꽃나무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다시 한 번 神妙한 자연의 섭리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세상에는 항하사수(恒河沙數)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상자상의(相資相依)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누구도 單獨者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 ‘너’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나’는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
너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윤택하기도 하고 피곤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가 언제나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관계는 이해가 엇갈리고 대립과 갈등이 수없이 반복된다. 떡 하나를 놓고 누가 먼저 먹느냐로 으르렁대기도 하고, 두 남자를 놓고 한 여자가 미묘한 줄 당기기를 하기도 한다.
세계의 정치체제는 동서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남북의 빈부문제로 옮겨가기도 한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관계와 관계, 세상은 실로 重重無盡緣起의 바다이다.
누구에게나 관계의 바다를 어떻게 헤엄치느냐는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어릿광대가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곡예를 연출하며 출세의 일직선을 달리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중간에서 失足하거나 아니면 아예 줄타기를 포기하는 일조차 생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도 세속적인 욕망이 전제된 관계란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늘 불편과 불안이 尙存하기 마련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고른 화음을 내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러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관계속의 인간이 관계의 원리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관계의 원리란 한마디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사는 곳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나’와 ‘남’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나와 남은 언제까지나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이다. 서로 다른 존재끼리 사는 곳이기 때문에 한 존재가 무엇을 독점하면 반드시 다른 존재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게 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자신이 주장하는 만큼 남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평범한 관계의 원리를 무시하고 나만 잘나고, 잘 먹고, 잘 살려고 할 때 불협화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관계의 원리가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더불어 살기를 원치 않고 혼자만 살려고 발버둥 친다. 혼자만 살려고 아우성칠 때 관계의 원리는 무너지고 弱肉强食의 힘의 원리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관계의 원리를 무시하고 더불어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는가? 더불어 살면 손해 본다는 현상적 인식이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일 수 있다.
남은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는데 나만 그렇게 산다면 손해라는 생각은 사람들의 뿌리 깊은 迷妄일 뿐이다. 사물의 진상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 無明에 근거한 소유욕이야말로 세간의 五濁을 만들어내는 원흉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계의 원리에 의해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어지지 않는 것도 이 끝간데를 모르는 소유욕 때문이라는 聖者들의 지적은 그래서 경청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숙명적 有限의 존재다. 아무리 세계의 寶華를 다 모아도 그것이 언제까지나 나의 것일 수 없다. 諸行無常이요. 諸法無我라 하지 않는가?
물론 인간이 이슬만 먹고사는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다툼과 갈등을 극복한 새로운 안간지평을 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지평을 열어가는 일에 내가 먼저 동참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풀꽃과 꽃나무가 자기의 세계를 지키면서도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처럼 인간의 삶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마당, 여기에 초청된 사람은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한 사람뿐이다.
그 옛날 짚신을 만들어 팔아온 父子의 이야기다. 항상 아버지의 짚신이 잘 팔려서 비결이 궁금했던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기 전까지도 잘 팔려나가는 짚신의 비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았던 아버지! 죽는 순간에 털 털 털 하면서 아버지는 눈을 감는다. 짚신의 털을 잘 다듬는 것을 자식에게까지도 일직이 전수 못하는 관용을 과연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인가?
이제 我田引水는 안 된다. 敎學相長의 신작로를 만들어야 한다. 慶事가 있다면 진심으로 축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축하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단 하십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등등.
훈훈한 인사의 말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배가 아닐까? 이제는 宜寧고을에 敎學相長의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의 큰 동산을 만들어 보자. 그것이 더불어 사는 것이고, 더불어 사는 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