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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어 더 아름다운 것- 추억산책

정영기(전 신반중학교 총동창회 회장)
편집국 기자 / 입력 : 2008년 12월 02일











▲ 정영기
신록의 물결을 따라 시오리(十五里) 그 냇길을 걸어보았습니다. 드넓은 들녘을 따라가는 십리(十里) 시냇길을 “시오리”라 이름지어 소중한 은어(隱語)마냥 아끼던 그곳 말입니다. 덧붙인 오리(五里)는 가슴 속에 펼쳐진 찬란한 꿈의 길이라고 했던가요. 혼자 걸어본 추억의 길은 아무리 걸어도 끝을 알 수 없는 영원한 꿈의 길이었습니다.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가곡 “보리밭” 가사 때문에 한참 언쟁을 했었지요. 참으로 오래 전의 일입니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공허한 하늘이 “빈 하늘”인가 “긴 하늘”인가를 가지고 다투다가 끝내는 둘 다 맞다하고 마주보고 웃고는 또 걸었지요. 다투고는 웃기도 하다가 또 한참을 다투어서, 설움 같은 눈물이 종잡을 수 없이 흐르다가도 어느 새 밝게 웃으며 멋쩍어하기도 했었지요.


아무리 채워도 다함이 없는 공허한 가슴이 되어 지평선 너머 까마득한 하늘 아래로 줄달음을 치던 때였습니다. 두근거림은 터질듯 차오르며 멈출 수가 없는데도, 가슴에는 왜 언제나 채우지 못한 빈자리가 가없는 하늘처럼 펼쳐져 있었을까요. 청운의 의지가 아직은 격류처럼 내달으며 시공의 개념조차 무시한 채 그 현란한 색깔로 높푸른 하늘을 채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득한 벌판 저 끝에서는 아지랑이가 신기루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끝닿을 때까지 걷고 싶었습니다. 까닭을 알 수 없이 마구 내닫다가 문득 멈춰 서서 길섶 작은 풀꽃들을 한 참씩 바라보곤 했었지요. 맑은 냇물에 띄운 풀잎들이 수면 위를 맴돌아 번져가는 둥근 파문들은 동심원의 중심을 향해 모여들고 겹쳐지며 함께 걷는 의미로 다가왔었지요. 강렬한 햇빛이 수면위에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착각처럼 내던진 돌팔매에 작은 물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찬란한 꿈의 날개가 힘찬 비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멋대로 자란 푸나무들이 길을 덮기도 하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덤불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간간이 흔들리는 숲 언저리에는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을 뿐 한낮은 고요하기만 하였습니다. 가만히 다가 선 찔레 숲에는 작은 멧새 한 마리가 더위를 피해 숲 그늘 아래에서 포륵포륵 날고 있었습니다. 날개 끝에 이는 가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하얀 꽃잎 몇 개가 한적한 한낮을 더욱 적막하게 하였습니다. 애잔한 그리움이 적막을 헤집고 머나먼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미풍이 불어왔습니다. 찔레꽃 하얀 얼굴을 가만가만 흔들어 주었습니다. 추억이 그려진 그림은 정물화가 아닌 것 같습니다. 꽃들의 흔들림이 추억의 모습들을 하나씩 떠올려 주었습니다. 작은 바람의 속삭임에 가만히 고개 젓는 하얀 꽃들의 대답이 맑은 여울 같은 울림으로 들려왔습니다. 추억은 추억 속에서 아름다운 것이라는 울림이었습니다.


진초록 이파리들 사이로 화사한 얼굴을 내밀던 꽃들의 언저리에서 낮의 열기가 식어가며 어느 새 엷은 저녁 안개가 내리고 있습니다.


먼 산들의 능선을 따라 붉은 노을이 물들고 있습니다. 노을이 번져가는 빈 하늘이 더욱 길게만 보입니다. 이제 돌아서 가야할 텅 빈 "시오리" 길에도 노을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추억의 그림자는 비어 있는 길 위에 더욱 짙게 드리워지는 것 같습니다. 얼른 떠나지 못하는 발길을 붙들어 놓고, 노을이 망설이듯 꽃의 언저리에서 선홍의 눈물처럼 번지는 것은 추억을 장식하는 슬픔 같은 것, 아마 “찬란한 슬픔" 이라 해야겠지요.


낮이 기울고, 이제 곧 엷은 저녁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겠지요. 초록의 숲도 꽃들의 모습도 짙어가는 어둠에 묻혀 커다란 덤불숲의 윤곽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나의 발길도 어둠속으로 사라지겠지요. 그러나 추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마련하는 고요한 사유(思惟)의 공간에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먼 곳에 있어서 추억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꺼질 줄 모르는 찬란한 빛입니다. 추억을 적어 보내는 편지는 언제나 향기롭습니다.

편집국 기자 / 입력 : 2008년 1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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