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의 출생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고 다만 삼국사기 권32, 악지 가야금 조에 의하여 그 지명을 밝혀야 하는데 거기에는 「신라고기에 이르되, 가야국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이것을 만들었는데,… 악사 성열현인(省熱縣人) 우륵에게 12곡을 만들도록 명하였다」라는 기사밖에 다른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성열현」이 어디인가를 밝히면 우륵의 출생지가 밝혀지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의령현 읍지」에 따르면 「본 신라 장함현은 경덕왕이 호를 의령으로 바꾸고 함안군에 소속시켰다. 고려 현종 때는 진주에 속했는데 공양왕이 간무를 두었다. 이조에 와서 현감으로 바꾸고 신번현(현 동북 50리에 있는데 본대 신리 신이현(新爾縣)인데 주오촌(朱烏村)이라고도 하고 천천현(泉川縣)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덕왕이 의상현(宜桑縣)으로 바꾸어 강양군(江陽郡)에 소속시켰다. 고려초 신반(新反)으로 바꾸고 공양왕 3년에 내속하였다」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여 보면 의령과 신반은 옛날부터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성열현(省熱縣)은 어디일까. 「성열」의 옛날 음은 「녤/ 녈」 「/ 늘」로 읽혔고 「新爾」는 뜻으로 보면 「너」가 되는데 「녤> 녈> 널> 너」로 본다면 「너> 내(泉川)> 새로(新反)」로 변천하여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新反」은 이두로서 그 뜻은 「새로이/ 새로」이다. 성열현은 본래 변한 12개국 중의 하나로 독자적인 부족국가였던 것 같은데 후에 대가야국에 병합되면서 새로 편입된 나라라 하여 「省熱縣」 즉 「新反縣」으로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일본 학자들은 「新反縣」을 변한 12개국 중의 「미조야마국」이라 한다고 하니 아마 「미악(彌岳)국」 즉 「미타산」을 중심으로 한 나라라는 뜻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미타산성이 성열성이 아니었던가 싶기 때문이다. 이 미악국은 초팔혜국(草八兮國)<지금의 초계>에 속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미타산은 과거에 초계에 속했다가 최근에 와서 다시 부림면으로 내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면 「우륵」의 성은 무엇이었던가? 글쓴이가 생각하기에는 성은 「우(于)」요 이름은 「륵(勒)」이 아닐까 생각한 일이 있는데, 왜냐하면 충주에 가면 우공해(于公海)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우륵」의 성은 「설(薛)」씨라 하는데, 신반에는 신라시대이전부터 「설(薛)」씨가 들어와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삼국사기에 보면 「선덕왕 13년(644) 9월에 왕은 김유신을 상장군으로 하여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성을 토벌하였다. 그 결과 크게 이겨 가혜(加兮)의 항을 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 「성열현」이 백제의 땅이었던가? 그런 것은 아니고 일시 백제가 점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그래서 김유신 장군이 백제군을 물리친 것이다.
「한국 땅이름 큰사전」에 따르면, 「성열성터」가 나오는데 그 설명을 보면 「충북-제원-청풍-물태-물태리에 있는 옛석성터, 옛 청풍 고을의 읍성이었음」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우륵이 대가야의 가실왕에게 간 것으로 보면 지리학상 맞지 않는다. 그리고 위 「땅이름 큰사전」의 「우륵 선생터」라는 제하의 설명은 「경북-고령-고령 쾌번-메나릿골 입구에 있는 터. 가야국 가실왕 때 악사 우륵이 이곳에 살면서 가야금을 만들었다 함」으로 되어 있는데, 「우륵」이 성열현에서 그곳으로 가서 가실왕의 지시에 다라 가야금을 만들었을 것이니, 그곳이 출생지는 아니다. 의령과 고령은 거리도 그리 멀지 않으므로 「우륵」이 걸어서 갔거나 말을 이용하였거나 하여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우리는 그냥 지낼 수는 없지 않을까? 뭔가 「우륵」에 대한 자취라도 남김으로써 고향 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때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우리 군민 모두가 뜻을 합하여 내일의 우리 고장을 위하여 문화 사업에 적극적으로 힘을 합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