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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영전에 명복을 빌며


관리자 기자 / 입력 : 2004년 04월 02일
지난 2월 25일 17시30분에 어머님께서(향년 89세) 노환으로 타계하셨다. 고애자(孤哀子)가 된 본인은 이를 계기로 가계를 되돌아보고 과거를 조명해봄으로써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펜을 잡아봅니다.
 순흥시조공(順興始祖公)의 24세손이며 탐진시조공(耽津始祖公)의 18세손이신 저의 증조부(1866년생)께서는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신 사과(司果) 송은공(松隱公) 안창제(安昌濟)이시다. 증조부께서는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인 한일합방직후 45세의 나이로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셨다.
 조부(1892년생)께서는 당시 19세였으니 조국의 독립운동과 제2세 교육에만 전념, 동분서주하시다가 1931년 장춘 만보산사변(長春 萬寶山事變) 때 불행하게도 몽매(蒙昧)한 난병(亂兵)에 의해 증조부모님과 동시에 참화를 당하심에 증조부모께서는 66세와 64세였으며, 조부께서는 불혹(不惑)의 40세였다. 일시에 고자(孤子)가 되신 저의 선고(先考,1914년 만주 태생)께서는 1916년생인 선산김씨(善山金氏) 철묵(哲默)씨의 여(女) 교강(敎康) 어머님과 결혼(1930.1.28)하신 이듬해가 되신다.
 부조(父祖)가 모두 독립운동으로 만주 각지를 전전하시는 사이 선고께서는 일정한 수학(修學)을 못하셨으나 조부(祖父)의 슬하에서 한문을 배우시고 농사일과 독립군의 심부름 등으로 사친봉행(事親奉行)을 깊이 체험하셨으리라. 이 세분의 유해(遺骸)를 만주에 두시고 편모시하(偏母侍下) 삼남매와 함께 그 해 11월 23일 고향인 부림면 입산(立山)으로 귀환하셨다.
 선고께서는 처음보시는 낯선 입산은 상자지향(桑梓之鄕)으로 일가친척들이 오순도순 의좋게 사는 곳이었겠지만 만사가 생소해 10대의 가장으로서 어려움이 너무도 많으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 3년을 보내신 후, 1935년 봄에 처가에 다녀오시겠다며 집을 나서신 선고께서는 양대 3위 분의 유골을 봉안(奉安), 환국한다는 결심으로 19일 동안 걸어서 걸식과 품팔이로 만주 대고가자(大孤家子)의 분묘지에 도착하시어 호천망극(昊天罔極)의 통곡을 하신 후 고향으로 연락하시여 1년여를 준비, 1936년 3월29일 양대 3위의 유골을 수습하여 안고 고향으로 봉안하셨다. 그 날부터 7일장으로 사림에서 개명하기를 `요동포사 탐진안공지궤(遼東逋士 耽津安公之櫃)``라는 마지막 관두사(冠頭辭)로 안장하셨다 한다.
 선고의 `위선사업(爲先事業)``과 충효정신의 계승사업은 각고면려(刻苦勉勵)하시며 만주에서 환국할 때 휴지뭉치로 위장해 감추어오신 증조부 유고(遺稿)를 해방 전까지는 숨기고 계시다가 해방 후 떳떳하게 문집간행(文集刊行)을 다짐하시며 조상을 위한 현창사업(顯彰事業)의 완결 차원에서 일각을 여삼추(如三秋)처럼 준비하셨으리라 믿는다.
 6·25동란 때 유고일부를 손상하였으나 강한 집념으로 만난(萬難)을 무릅쓴 고투 끝에 맺어진 피눈물의 결정, `송은문집(松隱文集)``을 1967년 간행 완료하셨다. 항일과 애국의 열혈이 맺힌 기록으로 황매천(黃梅泉)과 송연제(宋淵齊)의 주차(奏箚)에서 이미 증언하였으며, 건국 후 당시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 정인보(鄭寅普)선생께서 증조부 양대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伸 )하시며 충효경전으로 선고를 위로하셨다 한다.
 1978년 3.1절을 기해 대통령표창에서 재심청구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게됨은 “이현부모(以顯父母)가 효지종야(孝之終也)”라는 교훈을 몸소 실천하신 바다.
 1979년 2월에는 빈약한 재정으로 송은정(松隱亭)을 건립하시며 증조부의 유지를 받들게 하셨으나 1990년 8월 10일 향년 77세 희수에 교통참사로 타계하셨으니 생전사후 4차례 유관기관으로부터 효자표창으로 의령군지 및 담수(淡水) 제9집에 소상히 기록되시기도 하셨다.
 이번에 운명하신 선비(先쯼)께서는 6·25사변 중 시모를 업고 수십 리 피난생활뿐 아니라 조모께서 1991년 2월 26일 백수(白壽)의 노환으로 타계하실 때까지 50여년 중 30여년은 앉아 계셨고 말년 20년은 누워 계셨으니 병석간호 대소변수발은 물론 세수 양치질과 조석봉양하고도 소홀함이 없으셨고, 고희를 넘기시고도 시모께서 대안불식(對案不食)하시면 `사득양찬(思得良饌)``하심이 비일비재하셨다. 선비께서도 향내 유관기관으로부터 3차례의 효부표창으로 군지에 이름 남기시기도 하셨다.
 저는 지난 2001년 3월 17일 마산 우거(寓居) 37년을 정리하고 귀향하여 편모시하 3년을 보냈음으로 너무도 아쉬움만 남았을 뿐 이제는 영영 어머님을 뵈올 수가 없게 되었으니 느껴보지 못한 은심생육(恩深生育)이 호천망극(昊天罔極)인가합니다.
 선고비 양친의 생전 모습을 항상 가슴에 담고 저의 선대가계의 `이효위충(移孝爲忠)`` 정신을 가훈으로 삼아 이웃과 사회에 필요한 자리 매김 되겠다는 다짐으로 여생을 보낼까 생각하며 부모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빌 뿐입니다.
2004년 3월
고애자(孤哀子) 안찬달(安贊達) 올림
관리자 기자 / 입력 : 2004년 04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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