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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뱃사공 진실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577호입력 : 2021년 10월 14일
ⓒ 의령신문
 
 
□ 들어가는 말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역사의 진실은 잊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잊혀서는 안 되며 반드시 사실 그대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생전에 발자취를 밝혀두지 않으면 사후에 사실과 다르게 알려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해관계로 갈등이 고조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중가요 “처녀 뱃사공”은 1959년 황정자의 노래로 발표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가요인데 이런 국민 애창곡을 두고 2008년부터 남강을 사이에 둔 의령과 함안에서 이 가요의 작사 배경과 관련하여 자기들의 관내에서 발생한 일이라 서로 주장하다 마침내 함안군에서 먼저 ‘처녀 뱃사공’ 노래비를 세우고 함안천 주변을 관광지로 만들었다.

 필자는 의령군 공무원으로 재직 시 이에 대한 진위를 밝히고자 노력했지만 마무리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금년 9월부터 의령향토문화연구소 허영일 소장과, 김진수, 이석대 연구위원의 협조를 받아 이 문제에 대하여 진실을 밝히고자 당시 처녀 뱃사공이었던 이필남 여사를 수소문 하여 만나 그 증언을 청취하고 북실나루와 그 일대를 함께 돌아보며 당시 상황을 조사하였다. 이필남 여사가 증언하고 현장에서 조사한 사항을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 ‘처녀뱃사공’ 노래비 앞면

처녀 뱃사공
작사: 윤부길, 작곡: 한복남, 노래: 황정자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낙동강 강바람이 앙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 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어머님 그 말씀에 수줍어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 처녀 뱃사공 노래비 뒷면

노래비를 세우면서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인 故 윤부길(가수 윤항기, 윤복희의 父) 씨가 6.25 피난시절을 끝내고 서울로 가면서 우리군 가야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가던중 이곳 대산면 악양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이곳 나루터에는 군에 입대한 후 소식이 끊긴 박기준(6.25 전쟁중 전사) 씨를 대신하여 여동생 두명이 교대로 나룻배의 노를 저어 길손을 건너게 해주고 있었다. 오빠의 소식을 기다리며 나룻배의 노를 젖고 있다는 애절한 사연을 들은 윤부길 씨가 “낙동강 강바람이...”라고 시작하는 노래말을 만들었고 한복남 작곡가가 곡을 붙여 1959년 가수 황정자의 목소리로 <처녀뱃사공〉이 발표되어 전 국민이 즐겨 부르는 국민애창곡이 되었다. 이에 그 사연을 담아 이 노래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2000년 10월 2일 함 안 군

□ 처녀뱃사공과 노래비는 사실과 다르다

 위 노래비는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산 99변지에 있다.
‘처녀 뱃사공’ 노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국민들의 애창곡이 된지는 오래 되었다.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가사가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뱃사공’ 가사의 배경이 되는 곳은 이곳 함안군 법수면 소재 함안천(샛강)이 아니라 남강본류의 북실나루이다. 이 나루는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소재 다리미산 기슭 움푹 들어간 바위 사이 선착장과 의령군 정곡면 적곡리를 오고가는 주 경로(徑路)이다. 그리고 가사의 주인공 처녀뱃사공 실존인물은 이필남(1937년생) 여사이고 현재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하며 농사도 짓고 있다.

□ 윤부길 악단장을 건네준 곳은 북실나루다

 주변 지형 및 남강의 위치와 물 흐름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의령쪽 북실나루로 건너 왔다는 정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래쪽 지도를 살펴볼 떄 대산면 서촌리 고개를 넘어오면 바로 다리미산 기슭 선착장에 도착한다. 노와 삿대를 저어 강을 가로질러 가는 경로가 바로 의령군 정곡면 적곡리 북실나루이다.

ⓒ 의령신문

 둘째, 함안군에서 2000년도에 세운 처녀 뱃사공 노래비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악양루가든이 있는데 이곳 바로 앞이 법수면 윤외리를 건너는 줄배가 있었던 위치이다. 가든 정면 바로 밑 부분이 당시 뱃길이었는데 이곳은 남강이 아니라 함안천(샛강이라고 함)이다. 이 함안천에는 노와 삿대를 저어 건너는 것 보다는 누구나 줄배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고, 다만 홍수일 경우는 남자 뱃사공이 강을 건너 주었다.

 셋째, 함안천 나루를 이용했던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이다. 줄배는 줄만 당기면 되지 노를 젓거나 삿대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함안천(샛강)에는 처녀뱃사공이 없었다는 것이다.

□ 작사가 윤부길(1912∼1957)과의 인연

 윤부길은 작사가 성악가 뮤지컬배우 극작가 희극인으로서 예능에 걸출한 재주를 가진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필남 여사는 당시에 2척의 나룻배를 운항했는데 사람은 작은 배로왕래하고, 부피가 크고 무거운 나무짐 및 농산물 그리고 소 등은 큰 배로 운반 시켜주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힘든 뱃사공을 하고 있던 중 6.25전쟁이 휴전된 1953년 9월 어느 날 다리미산 선착장에서 의령 북실나루로 일행을 건너 주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윤부길 유랑극단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의령장날에 가서 공연하기 위하여 지름길인 북실나루로 왔던 것이다. 강을 건넌 일행은 날도 저물고 교통편이 없어 나룻가 처녀 뱃사공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처녀가 넓은 강(약 100미터 이상의 폭))을 삿대와 노를 가지고 거센 물결을 헤쳐서 나아가는 모습을 눈 여겨 보았던 것 같다. 악단이 저녁식사 후에 대나무 막대기 같은 것으로 소리도 내며 노래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들었다. 윤부길 단장은 무슨 사연으로 뱃사공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는데. 이필남은 당시 홀어머니와 같이 있는 형편이라 연약한 여자들만 있으니 사실상 없는 오빠(본래는 3명 있었으나 모두 일찍 사망)를 군대에 가 있다하면서 곧 제대하고 올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이 사연을 들은 윤부길 단장은 처녀가 한 이야기를 믿고 ‘처녀뱃사공’ 노래 가사에 이 사연을 넣었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 윤부길 악단장의 모습은

 처녀뱃사공 노랫말 작사자 윤부길은 유명한 유랑극단 단장이며, 가수 윤항기, 윤복희 씨의 부친이다. 그를 본 처녀 뱃사공 이필남이 말하기를 윤 단장은 키가 크고, 야윈 편이고, 얼굴은 갸름하고 야위었는데 잘생긴 얼굴이었다고 한다. 삼베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 처녀 뱃사공 발자취

 가요 ‘처녀 뱃사공’의 주인공은 바로 이필남(37년 12월 7일생)이다. 여사가 처녀 뱃사공이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여사의 부친은 원래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309번에 살다가 처가 곳인 의령군 정곡면 적곡리 268번지로 전적하였고, 이후 적곡리 42-2 번지(대지)인 북실나루터에 이사하여 뱃사공으로 살았다. 9명의 형제 중 오빠 3명과 자매 2명은 모두 일찍 잃었고 다행히 4명의 딸 월수, 필상(처녀뱃사공), 필남(처녀뱃사공), 동생 용수가 있었다. 부모님은 용왕님의 은덕으로 아들을 낳기 위하여 강가에서 뱃사공을 하며 공덕을 쌓았다. 처음으로 증언한 2008년 당시 두호마을 거주 최용완(76세)님의 증언에 따르면 이필남 부모는 아들을 낳으려고 자청하여 뱃사공 일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부산 다대포에서 남강뱃길로 지정, 정암, 장박, 진주 등으로 오르내리던 장사꾼들이 뱃사공 집을 드나들 때 아버지가 이들의 사기에 넘어가 그 해 추수한 곡식과 재산을 모두 배에 실어 이들과 같이 부산으로 간 후에 창녕군 남지까지 돌아 왔다는 기별을 받고 어머니와 딸은 남지로 아버지를 모시러 가서보니 아버지는 매우 위독한 상태인데도 사기꾼들은 가버리고 없었고 지게꾼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지고 왔으나 결국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애통해 하면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돕기 위하여 아버지가 하던 뱃사공 일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진짜 처녀 뱃사공 이팔남이 맞다

 아버지 이덕부 어머니 전복이 여사 사이에 태어났다. 1937년생(84세)으로 1953년도 윤부길 씨를 만났던 당시는 만16세였다. 홀어머니와 함께 정곡면 적곡리 42-2번지 북실나루에서 생활하면서 6.25전후인 1951∼1955년 함안 대산을 왕래하는 나룻배 사공을 하였던 것이다. 주 노선은 북실나루터에서 대산 서촌리 산 125번지 다리미 산기슭으로 왕래하는 나루였다. 결혼 후 북실나루터에서 약 1키로미터 남짓 떨어진 함안군 법수면 윤외리 110번지(악양길83)에 살다가 현재 가야읍에 살고 있다.

□ 맺는 말

 이 논쟁에 대하여 2008년 7월부터 보도한 신문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령신문(2008.7.11.), 함안신문(2008.7.17.), 경남도민일보(2008.7.17.), 의령신문(2008.7.25.), 네이버뉴스(2008.8.25.), 경남일보(2008.8.29.), 연합뉴스(2008.9.2.), 경남도민일보(2008.9.3.), 경남신문(2008.9.4.), 경남매일(2008.9.4.), 조선일보 및 조선TV인터뷰 등.

 실제로 윤부길 단장이 건넌 강은 남강인데 가사는 낙동강으로 나온다. 그래서 윤부길 단장이 착오했을 수도 있고, 가사에 첫 곡조가 남강 보다는 낙동강으로 시작하면 부르기가 쉬울 것 같아서 작사 했는지는 우리가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윤부길 단장에게 사연을 이야기 했던 처녀 뱃사공이 현재 생존해 있고 둘이서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지금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명확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필남 여사는 자신이 처녀 뱃사공 주인공이라고 주장할 기회를 놓쳤다고 하는데. 왜냐면 함안군에서 노래비 건립을 위하여 마을사람들과 회관에서 협의할 때 직접 찾아갔으나 관계자가 이필남 여사에게 말하기를 다된 일에 왜 왔느냐 하면서 회관에서 밀려나오게 되자 몹시 서운한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지 못한 게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진다고 함. 지금이라도 반드시 이 사실을 바로잡아서 정리해야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처녀 뱃사공 진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공동 자료조사팀. 왼쪽부터 허영일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소장, 당시 처녀 뱃사공이었던 이필남 여사, 신경환 경남향토사의령지회장 겸 경남향토사이사인 필자, 이석대 김진수 의령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 의령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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