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의 의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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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인물연구회 준비위원·
17-18대 국회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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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양성에 투자
아끼지 않은 의령 부자
의령의 부자들과 석학들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일제강점기의 백산 안희제, 남저 이우식 등이 늘 고향의 뛰어난 인재들에게 학자금과 유학비용 등 인물에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듯이 정곡면의 이병철 삼성 회장과 화정면 출신의 남상철(상공부 고위직 그 후 기업인으로 변신)도 서울로 유학 온 의령인들에게 많은 학자금을 지원하며 고향을 잊지 않았다. 전원용(성균관대학) 초대 민선 군수 등 의령 학우 출신들이 면면히 이어온 선각자들의 고향 사랑의 혜택을 받아 왔다.
이병철 회장은 의령에 직접 내려와 의령여중에서 제일모직 등에 취업할 사람을 채용하여 이들의 월급으로 가족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데 큰 일조가 되었고 추석이나 설에는 귀향하는 무리들로 관광버스가 줄을 있기도 했다. 남상철씨는 의령 올 때는 서울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화정으로 버스를 타고 왔는데 어느 날 진주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좁은 공간에서 일이 넘쳐 땀 흘려 일하는 두 형제를 보고 넓은 곳에서 작업을 안 하느냐고 묻자, 돈이 없어 넓은 곳에 못 간다는 말을 듣고 성실한 이들에게 보증을 써주고 국비융자를 받게 해주어 오늘날 대동공업사 창립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의령은 부자도 많고 부자의 전설도 안고 있다. 지금이야 다소 시들해졌지만 한때는 전국의 유명 관광코스 중에 하나로 꼽히며 너도나도 부자의 기를 받겠다고 의령을 찾았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정암(鼎巖) 솥바위를 가운데 두고 반경 20여리 안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벌 기업의 창업주 세 명이 태어났다. 의령 정곡면에서 삼성 이병철 회장이, 지수면에서 금성 구인회 회장이, 함안 군북면에서 효성 조홍제 회장이 태어났다. 거기다가 단일 기업으로는 최고 많은 장학금을 출연한 관정 이종환 문화재단 설립자가 의령 용덕 출신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편을 보면 “대천”( 大川 )이 세개니 첫째가 낙동강이고 둘째는 남강이라, 그 근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남쪽에서 나와서 진주 서편에서 합류하여 광탄(廣灘)이 되고 의령에 이르러 정암진(定巖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기음장으로 들어간다. 셋째가 초계 황둔진이다, 고 기록되어 있다. 남강은 함양, 산청, 진주를 거쳐 의령으로 넘어 온다. 이름도 제 각각이어서 함양 산청물은 경호강이요. 진주는 남강, 의령은 정강(鼎江)이라 부르는데 의령에 이르러 부자상(富者相)의 콧방울 같은 솥바위, 정암(鼎巖)을 떨꿨다.
정암은 다리 세개가 달린 바위가 반쯤 물속에 잠겨있는 모습이 솥과 같다하여 붙은 이름이니 솥바위의 뜻을 충실히 옮긴 훈차자(訓借字)라 할 것이다. 실제로 고지도에는 정암을 다리가 셋 있는 모양의 솥으로 그리기도 했다. 솥이라는 게 곡식과 재물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정암을 품고 있는 의령은 식복을 타고 난 셈이고 그래서 이름도 형편 좋고(宜) 편안 할(寧) 땅 의령일 것이다.
정암나루는 1935년 정암 철교가 놓이지 전까지는 남강의 수십 개 나루 중에서도 가장 큰 나루였으며 경남의 중서부 지역으로 연결되는 요지이자 의령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으로 나루터 근처는 민물횟집과 주막이 즐비했다.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남강을 거슬러 전라도 곡창지대로 들어가려는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정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곡식과 재물의 상징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경남에서 가장 군세가 작고 초라한(?) 의령의 현실에 씁쓸하기도 하지만 언젠가 이름과 상징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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