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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 지킨 고루 이극로 선생

김정권의 의령이야기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567호입력 : 2021년 05월 13일
김정권의 의령이야기
 
(의령인물연구회 준비
위원·17∼18대 국회의원)
 
   


민족의 얼 지킨 고루 이극로 선생  

의령은 예부터 인물의 고장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 근·현대에는 이병철 안희제. 의병으로, 경제로, 독립운동으로 모두들 나라를 구한 인물들이다. 또 의령부자망개떡, 의령한지, 의병의날 국가기념일, 소싸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0호 세계기네스에 오른 큰줄땡기기. 의령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령을 17대,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정권 의령 인물 연구회 준비위원이 구석구석 다니며 보고 느끼는 의령 이야기를 펼쳐낸다.
<편집자 주>


2019년 1월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이 배경이다. ‘말모이'는 1910년대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조선광문회에 참여하여 편찬을 시도한 최초의 우리말 원고다. 당시에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출판에 이르지 못했으나 이후 조선어학회를 거쳐 1947년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말 큰사전’이 나오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화에서 배우 윤계상이 연기한 류정환의 실제 인물은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극로 선생이다. 그는 1893년에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태어났다. 

예전에는 듬실마을이라 했는데 전의이씨(全義李氏)집성촌이었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듬실마을은 산줄기가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간지역이라 산림이 팍팍했고 이극로의 집안 또한 가난한 농가였다. 실제 두곡리 주변으로는 매봉산, 두목산, 절골, 탑골, 점뒤, 서재골, 골안 등산과 골짜기 지명이 유독 많다. 
농사일을 도우며 두남재(斗南齋)에서 한학을 배운 그는 공부를 위해 17세의 나이에 무단가출하여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했다. 가난도 가난이었지만 부모가 반대하는 신식공부를 하겠다고 나간 아들에게 집에서는 한 푼도 지원을 하지 않았고 그는 은단을 팔아 고학을 하며 남하 이승규(노산 이은상의 아버지)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항상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살았는데 이승규가 그 까닭을 묻자 “저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주먹을 펴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창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3년 중국 서간도로 가서 항일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고 부설학교인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6년 두 살 위 고향 선배인 남저 이우식의 후원으로 중국 상해 동제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20년 졸업을 한 그는 오랜 꿈이었던 독일유학의 꿈을 안고 1921년 베를린으로 향한다. 그의 회고록 ‘고투 40년’을 보면 1921년 6월 프랑스 선적 배를 타고 출발하여 이듬해 1월 베를린에 도착한 것으로 나온다. 무려 반년이 넘는 유학길을 보면 북경-홍콩-베트남-수에즈운하-포트사이트-카이로-알렉산드리아-시칠리아-나폴리-로마-밀라노-베른-제네바-베를린으로 이어진다. 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베를린에 도착한 그는 1922년 8월 29살의 나이에 베를린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마침내 독일유학의 꿈을 이룬다. 100년 전 베를린으로 가는 길은 어땠을까? 상상으로도 닿지 않는 그 먼 길을 그는 오직 꿈 하나로 건너갔다.

 1927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영국 런던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수학한 후 1929년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와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그는 회원들에게 지금 우리가 민족 어문을 통일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사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멸망하고 만다고 설득하여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결성하고 간사장을 맡았다. 베를린대학 유학 시절 조선어과를 창설하여 3년 동안 무보수로 독일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는데 당시 학생들이 선생의 나라에는 국어사전도 하나 없느냐는 바람에 큰 창피를 느끼고 귀국하면 반드시 우리말 사전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어문을 정리 통일하여 보급함으로써 고유문화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민족의식을 앙양하여 독립을 위한 실력을 키우고자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우리말과 글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과목을 폐지하고 학교 안에서의 우리말 사용을 금지했다. 이들에게 조선어학회가 눈에 가시였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하여 10월 1일 이윤재, 최현배, 장지영, 이극로 등 핵심인사부터 구속하기 시작하여 모두 33명이 검거되었다. 여기서 이극로는 징역 6년형, 최현배는 4년형을 선고 받았고 이윤재와 한징은 모진 고문으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광복 후 출소한 그는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하여 다시 한글 연구를 이끌었고 1946년 건민회 위원장을 지내면서도 한글연구와 교육활동을 계속했다.

 나는 청년시절 민청활동을 할 때 김해출신 한글학자인 한뫼 이윤재 선생과 눈뫼 허웅 선생의 한글사랑에 감동되어 한글에 대한 관심과 이분들의 현양사업에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다. 그런 노력들이 모여 현재 김해에서는 다양한 한글 문화복합공간인 한글박물관도 문을 열었다. 의령에서도 고향출신 한글학자와 독립운동가에 대한 현양사업에 관심을 갖고 문화원을 중심으로 한글 박물관 유치에 나서고 있다. 이는 후손의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남북분단 이후 북행의 이력 때문에 민족 어문의 표준화와 사전편찬에 공헌한 이극로 선생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유보되어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고려한다면 고향 후학들의 더 큰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말을 지키고 민족혼을 지킨 위대한 고루를 알게 되었다. 선생의 발자취를 쫒다보니 이극로 선생의 일생에는 고향 선배인 남저 이우식의 후원이 늘 함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567호입력 : 2021년 0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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