志士(지사)는 1903년 11월 23일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世弟(세제)에서 출생하였다. 오대조 재문조 때 의령군 용덕면 가락에서 이거하여 고조 유신 증조 受贊 조 건호 고헌홍의 대를 이어 대대로 문행이 유명하였다.
지사는 용모가 출중하였고 총명하여 과인으로 가문의 촉망을 받았다. 장성하여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면서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15세에 진주보통학교에 입학 3학년 때 3․1독립운동이 일어나니 진주만세 시위에 가담하여 경찰에 연행되어 1개월간 구류되어 학교는 퇴학당하였다.
사재를 털어 야학당을 세워 항일정신을 후학들에게 심어주었다. 일경감시 때문에 1925년 만주를 거쳐 밀항하여 일본 大板 방직공장에 취업 후 조선인 근로자를 상대로 비밀리에 반일 독립정신을 선양하였다. 1930년 진주지구 총책 독립운동 조직책을 수임하였고, 1930년 7월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년여의 혹독한 고문으로 한때 가석방되어 궐석재판으로 1년 징역 3년간의 집행유예 형을 받았다.
고문의 여파 여독으로 인하여 1941년 12월 29일 39세의 향년으로 서거하였다.
일본고등법원 검사국 사상일보의 기록으로 독립유공자 표창과 동시에 2001년 유공자 증서가 추서되었다.
지사는 강취당한 국권회복을 위해 모진 고문으로 서거하였으니 무덤 속에 매장된 영령으로 하여금 경남 의령군 용덕면 가락리 383-1 세덕사에 영령을 보위함으로서 국태민안의 정신지주를 세우고 단일국가 건국후손들로 하여금 애국 애족 인류애를 승계하여 종속, 의타, 항쟁에 의한 집단 이기심을 잠재우고 세계인 한가족 자연친화 평화사상을 세계 만방에 공포하여 단군 황제 건국 조상의 혈맥을 이어 청와대를 황실로 봉칭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황제로 승위케 하여 국회로 하여금 통일국가 입헌기구로 존속케 할 것을 국가위기극복 애국지사 박호종 호국신전추도문을 수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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