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읍에서 대의 길로 오리정도 가면 가례복지회관 맞은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 ‘퇴계이황선생유허지 입구’라는 자연석비가 있다. 지시대로 골목길로 셋집 대문을 지나면 안내비가 나오고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을로 내려와 멈춘 산줄기 끝자락에 비스듬한 검은 바위 면에 ‘嘉禮洞天’이 있다.
바위벽은 가로 360㎝, 세로 240㎝이며 네 글자가 차지하는 크기는 가로 226㎝, 세로 30-45㎝이다. 우에서 좌로 배열하고, 가장 큰 ‘례’는 폭 33㎝, 세로 45㎝이다. 비바람에 ‘례’자와 ‘동’자, ‘동’자와 ‘천’ 사이에는 세로로 바위틈이 넓어지고, 세월의 무게로 음각이 마모되어 윤곽이 흐릿하다. 특히 ‘天’자는 식별이 어려운 상태이다.
마을 오씨(81) 노인은 옛날에는 가례동천이 새겨진 바위 앞에는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었는데, 가덕산이 밀려 내려 메웠다고 한다. 마을 앞의 白溪川은 자굴산 보리사에서 밥하는 뜨물로 내를 희게 되어 붙인 이름이고, 지금도 동네 아래 냇가에는 ‘백암’이라는 바위가 있고, 주변을 흰들이라고 한단다.
퇴계 선생은 21세에 허씨 부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부인을 항상 친구로 대하듯 하였다 한다. 처가는 칠곡면 도산마을로 초기에는 퇴계선생의 고향과 연관하여 小陶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퇴계선생은 의령 처가에 자주 들러 지역 선비들과 교유를 하는 한편, 때때로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바위에 ‘가례동천’이라는 친필 글씨를 남겼다.
허씨 부인은 두 아드님 준, 채를 두고 결혼 6년 만에 숨을 거두었으며, 현재 허씨 부인의 무덤은 영주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퇴계선생이 직접 쓴 ‘가례동천’ *이란 유필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여자는 시집오면 친정 동네지명을 ‘택호’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가례동천’은 허씨 부인의 택호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퇴계선생의 아들 채는 외할아버지의 농사일을 감독하며 농사꾼으로 자라 21세에 정혼을 해 놓고도 혼례를 올리지 못한 채 급사하였다고 한다. 채의 무덤은 가매장 했다가 사후 10년 후에야 외할아버지 선산에 이장되어, 지금의 의령 무하리 고망봉 산기슭에 묻혀 있다고 전해온다.
퇴계선생은 생과부가 된 며느리를 친정으로 되돌려 보냈는데, 훗날 한양을 가다 민가에 하룻밤을 유하게 된다. 반찬도 입맛에 맞고, 아침에는 족의를 내 오는데 발에 잘 맞아 ‘안 주인이 한때 며느리였던 그 여인일 것이다‘라는 야담이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가례동천’ 네 글자를 보고 있으면, 퇴계선생의 말씀이 들리는 듯하고, 부인을 친구처럼 대하며,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는 듯하다.
글자를 단장하고, 주변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정성껏 관리하는 것도 의령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 최인호, 장편소설 유림 3권, 유림원, 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