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회에서는 올해 정부의 승인 하에 고루 이극로 박사의 전기를 내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고루 박사의 행적이 완전히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입증하는 일입니다. 북한에서의 행적도 정치적인 것보다는 문화․학술적인 공적을 쌓은 분입니다. 마지막에 벼슬을 한 것은 자리가 탐이 나서 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자리를 주니까 생명 유지를 위하여 받아들인 것이지, 본인의 뜻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글쓴이가 몇 차례에 걸쳐 논하였지마는, 고루 박사는 김구 선생과 같은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분이었으며, 김구 선생과 늘 함께 정치 활동을 하였습니다. 뒤에 붙인 고루 박사의 광복 후 연표를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고루 박사는 상하이 유학 시절부터 임시정부 요인들과 접촉이 많았고, 따라서 북한에 갈 때도 김구 선생과 같이 갔으며, 가게 된 목적은 은사인 김두봉 선생을 모셔 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김두봉 선생에게 잡혀 북한의 말과 글을 정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어 그곳에 정착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어른을 고향 사람들이 감싸고 키워서 고장을 빛내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헐뜯고 비방하면 안 될 줄 압니다. 사실 고루 박사가 진짜 공산주의자였는데도 이와 같은 글로 감싼다면 글쓴이 자신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충북 괴산에서는 홍명희가 진짜 공산주의자로 자진 월북하였는데도 그의 생가를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래 전부터 홍명희 문학제가 열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홍명희에 비하면 고루 박사는 사상 면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루 박사뿐 아니라 이우식 선생의 기념관도 지어서 후세의 교육장으로 삼아야 함은 물론, 이들 애국자를 기림으로써 우리 고장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군민은 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고루 박사의 광복 후 연표를 붙임으로써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알리고자 합니다.
<고루 박사의 광복 후 연표>
1. 1945년 9월 :전국 정치운동자 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됨.
10월 :한글 노래 지어 한글날 기념행사 거행함.
조선 독립운동사 편찬 발기인 회의 위원으로 피선.
11월 :조선 교육심의회 초등교육위원으로 선임됨.
12월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선임됨.
2. 1946년 1월 :통일 정권 촉성회를 조직하여 좌우 합작을 바라는
성명서 발표.
2월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와 좌익의 민주주의 민족 전선에
참여하여 좌우 통일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자 두 단체에서
탈퇴함.
3월 :조선 정경학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됨.
5월 :조선 인류학회의 회장으로 취임함.
6월 :이승만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성명서 발표(6월 8일).
전국 정치운동자 후원회 해체, 건민회 조직하여 위원장이 됨.
7월 :조선 장학회 회장으로 추대됨.
8월 :미군정청 산하 전재동포 원호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됨.
9월 :조선교육심의회의 초등교육부 위원장으로 국민학교 의무교육 제도
실시를 관철시킴.
3. 1947년 2월 :통일전선 결성 준비위원회 구성. 조봉암, 배성룡, 김약수, 안병무
등과 상임위원에 피선.
3월 :민주주의 독립전선 위원장.
서재필 박사 환국 환영 준비위원회 부위원장.
5월 :미소공위대책 각 정당 사회단체 협의회 조직, 부주석으로 취임.
(주석은 김구 선생)
6월 :좌우 합작 위원회 위원.
9월 :김병로, 안재홍, 김호, 홍명희 등과 민족국가로의 독립을 염원하는
공동 성명 발표함.
10월 :민주독립당 결성, 민주독립당 중앙 집행위원.
12월 :민족자주연맹 준비위원회 선전국장.
민족자주연맹 집행부 부의장. (의장은 김규식)
4. 1948년 3월 :건민회 위원장으로서 단독정부 수립안 결정을 반대하는
담화 발표.
한글문화보급회 위원장으로 취임함.
4월 :남북 협상에 건민회 대표로 참여한 뒤 북한에 잔류함.
7월 :조선어학회 이사직 사임.
조선어학회 명예이사로 추대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