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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의 출신지에 대하여

김태식(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편집국 기자 / 입력 : 2008년 05월 17일











▲김태식
<<삼국사기>> 악지 가야금조에 인용된 <<신라고기>>에 의하면, 가야국 가실왕(嘉悉王, 嘉實王)이 가야금을 만들고 나서 악사(樂師)인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남제서>> 동남이전 가라국조에 의하면,
479년에 가라왕 하지(荷知)가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므로, 남제의 고제가 그에게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 즉 ‘가라국왕’을 제수했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 가라왕 하지는 고령 대가야 왕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온당하다. ‘하지’는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가야국 ‘가실왕’과 이름이 유사하여 같은 사람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렇다면 우륵은 5세기 말 내지 6세기에 걸쳐서 활약한 대가야의 악사로서, 원래는 성열현 사람이었는데, 대가야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고령 대가야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우륵이 성열현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가 그 곳 출신이었음을 가리킨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신라고기>>는 구체적인 책 이름이라기보다는 신라에 대한 옛 기록의 총칭으로 보이므로, ‘성열현‘은 신라 측의 지명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성열현이라는 지명이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조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이 어느 곳에 해당하는 지가 문제 된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삼국사기>> 권41 열전 김유신전 상권에 성열성(省熱城)이라는 지명이 나와서 그 곳이 어디인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에 따르면, 유신은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가 13년(644)에 소판이 되었고, 가을 9월에 상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省),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성을 쳐서 크게 이겼으며, 이로 말미암아 가혜진(加兮津)을 열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가혜성, 또는 가혜진은 <<삼국사기>> 권34 지리지의 신라 강주(康州) 고령군(高靈郡) 신복현(新復縣)의 옛 지명인 가시혜현(加尸兮縣)을 가리키니,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牛谷面)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찬자는 고령현 서쪽 10리에 가서곡(加西谷)이라는 곳이 있는데, ‘尸兮’가 바뀌어 ‘西’로 되었는가 의심하였다(권29 고령현 고적조). 또한 김정호의 <<대동지지>> 권9 고령 고읍조에, 신복(新復)은 고령 남쪽 30리에 있고 가시성(加尸城)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고령 서쪽 10리에 있는 가서곡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대동여지도>>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고령군 우곡면 면소인 도진리(桃津里) 위치에 ‘新復’이라고 표시되어 있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동화성은 <<삼국사기>> 권34 지리지의 신라 강주(康州) 성산군(星山郡) 수동현(壽同縣)의 옛 지명인 사동화현(斯同火縣)을 가리키니,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 일대(옛 칠곡군 인동면)에 해당한다. 동화성은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647) 10월조에 백제군이 무산성(茂山城: 전북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 경북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을 둘러싸자 김유신의 부대가 이를 물리쳤다는 기사 속에 ‘동잠성’으로 나오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9년(659) 4월조에도 백제가 신라 독산성(獨山城: 경북 성주군 독용산성)과 동잠성(桐岑城)을 공격한 기사가 보인다. 함께 나오는 주변 지명들로 보아 동화성 및 동잠성이 지금의 구미시 인의동 일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열성, 즉 성열현은 구미시 및 고령군과 인접한 곳으로서, 644년에는 백제의 영토, 647년에는 신라의 영토였고, 5세기 말 6세기 초에는 가야 영역에 속하였던 곳에서 찾아야 한다. 단순한 지명 음운 비교로 보아서는 <<삼국사기>> 권35 지리지 신라 삭주(朔州) 나제군(奈隄郡) 청풍면(淸風縣: 지금 충북 제천시 청풍면)의 옛 지명인 사열이현(沙熱伊縣)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곳은 위와 같은 전제조건을 충족할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


그에 비해 <<삼국사기>> 권34 지리지 강주(康州) 강양군(江陽郡) 의상현(宜桑縣)의 옛 지명인 신이현(辛爾縣)이 성열현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이곳은 현재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의 옛 지명으로서 그 치소는 신반리(新反里)이다. <<일본서기>> 권19 긴메이(欽明) 2년(541) 4월조, 5년(544) 11월조 및 23년(562) 정월조에 후기 가야연맹의 한 세력으로 나오는 사이기국(斯二岐國)이 그 전신이다.


이 지역은 562년의 가야 멸망에 의하여 신라 영토로 되었다가, 642년 백제 의자왕의 대야성(지금 합천) 공략 이후 40여 성이 함락되어 일시적으로 백제 영토로 되었으나, 644년에 압독주군주 김유신이 반격하여 낙동강변의 동화성(구미), 가혜성(고령 우곡), 성열성(의령 부림) 등 일곱 성을 회복하여 옛 가야지역 복구의 기틀을 잡은 것이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혜진의 길을 연 것이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해당 기사에서 이를 부연한 것이니, 낙동강 유역의 요지로 볼 때 동화성은 가혜진으로부터 상류의 요지였고, 성열성은 가혜진으로부터 하류의 요지였다.


가야 소국의 하나인 사이기국에 대해서는 의령군 부림면(옛 지명 辛爾, 朱烏, 泉州, 省熱)으로 보는 견해와 합천군 삼가면(옛 지명 加主火 또는 三支, 麻杖)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음운 상으로만 본다면 ‘신이’나 ‘삼지’ 둘 다 가능하겠으나, ‘성열성’이 구미 및 고령과 인접한 곳이라면 고령 우곡에 가까운 낙동강변 부림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성열’을 ‘신이’의 이칭으로 보는 데 대해서는 학계에 이론이 없으며, ‘城’이 ‘기’로 발음되었다면, ‘신이기’ 또는 ‘샘(泉)이기’는 ‘사이기(斯二岐: <<일본서기>> 발음으로는 시니키)’와 같은 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부림면 지방을 530년대에 일찍 신라에게 멸망한 탁기탄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것이 통용되려면 530년대 이후의 의령 지방 고분 출토 유물이 같은 시기에 멸망한 김해 지방(남가라국)처럼 완전히 신라 계통 유물로 전환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 시기에 신라에게 멸망한 지역에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령에서 신라 유물 일색의 고분이 다른 가야 지역보다 훨씬 빨리 나왔다는 증거는 없다. 반면에 최근에 발굴된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고분군과 부림면 경산리 고분군의 유물과 유적은, 6세기 중엽까지 이 지역의 고분군 축조집단이 대가야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왜와 약간의 문화적 교류가 있음을 보이고 있으므로, 부림 일대를 탁기탄국으로 볼 수는 없다.


의령읍의 옛 지명이 장함현(獐含縣) 또는 노함촌(奴含村)이고, 부림 일대의 옛 지명이 신이현(辛爾縣), 주오촌(朱烏村), 천주현(泉州縣)이었는데, 여기서 ‘獐’이 ‘노루 장’자이고, ‘泉’이 ‘샘 천’자이다. 그러므로 562년까지 존속했던 가야 소국 중에 임례국(稔禮國)=노함촌이 의령에 해당하고, 사이기국(斯二岐國)=성열성(省熱城)=신이현이 부림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부합된다.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 고분군에서는 6세기 중엽의 유물이 확인되었고, 신반리와 감암리에도 고분군의 존재가 알려져 있다. 이런 제반 근거로 보아, 사이기국은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일대이다.


우륵이 지은 12곡 중에 하나인 이사(爾赦)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알 수 없다고 처리하였으나, 근래에 사이기국(斯二岐國)과 같은 것으로 보아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 비정한 견해가 나왔다(다나카 도시아키, 1990, <우륵 12곡과 대가야 연맹>, <<동양사학연구>> 48-4). 위치 상으로 보아 일리가 있는 추정이라고 생각되어 그대로 따른다. 그가 만든 12곡 중에 하나인 ‘이사(爾赦)’가 사이기국의 음악을 가리킨다면, 이 자료는 대가야국의 통치 권력이 5세기 말 내지 6세기 초에 사이기국까지 직접적으로 미쳤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즉 사이기국 출신의 우륵이 대가야 가실왕에 협조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6세기 초에 대가야가 영산-밀양 일대로 진출하는 기지로서 이열비(爾列比)에 성을 쌓은 후, 사이기국(斯二岐國)의 대표자가 대가야를 포함한 가야연맹 사신단으로서 백제에 가서 두 차례의 사비회의에 참석하는 등, 가야연맹체의 발전 및 독립 보존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하다가 대가야와 함께 562년에 멸망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 이열비와 사이기국이 현재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일대라고 보면 모든 문맥이 순조롭게 해결된다. 신라는 이를 신이현(辛爾縣)으로 삼아 대량주군(大良州郡: 합천)에 영속시켰으며 후에 이름을 의상현(宜桑縣)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이름을 신번현(新繁縣)으로 고치고 고려 말 공양왕이 의령의 속현으로 삼았다. 부림면(富林面)이라는 이름은 1914년의 행정 개편 때에 붙여진 것이다.












▲ 우륵의 출신지로 거론되는 신반 시가지 70년대말 전경.
우륵이 대가야의 악공[工人]들을 거느리고 가야금을 탔다는 옛 고령현 북쪽 3리의 금곡(琴谷), 속칭 정정골(주산 동쪽 사면 하단, 고령읍 연조리)에는 고령군에서 1977년에 가야금의 형태로 만들어 세운 ‘우륵 기념탑’이 있고, 그에 인접한 고령읍 쾌빈리에는 다시 고령군에서 우륵박물관을 지어 2006년에 개관하였다. 또한 충주시 서북쪽의 남한강변에 접한 칠금동(漆琴洞)에는 우륵이 신라인 제자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다는 전승이 있는 탄금대(彈琴臺)가 있고, 그 곳에는 1977년에 예총 충주지부에서 세운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樂聖于勒先生追慕碑)’가 있다. 우륵은 지금까지 가야 멸망과 신라 문화 융성의 상징으로만 여겨져서, 그가 말년에 신라에 의해 안치된 충주 일대에만 전승이 존재하다가, 근래에 들어 고령군에서 그의 존재를 재확인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가야사 연구의 부진으로 인하여 우륵의 출신지 의령(부림)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편집국 기자 / 입력 : 2008년 0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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