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날짜 : 2024-05-20 13:18:38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기획특집

한국불교의 시원(始原)... 번성했던 가야국 기도도량

의령 누항애사 순례(4) - 오래된 기도도량 운암사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2월 03일

바위굴 신선당 한국전쟁 참상 목도


우륵의 고향 … 백산 등 인물 배출


 


 












의령읍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부림, 창녕 쪽으로 20㎞ 정도 가면 세간교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부림면소재지로 통하고 왼쪽으로 유곡천을 끼고 직진, 3㎞를 더 가면 낙동강을 건너 창녕군과 이어주는 박진교가 나온다. 박진교를 올라서기 바로 전 오른쪽 샛길을 따라 5분이면 운암사 주차장에 닿는다.


창녕 쪽에서는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지IC에서 진출, 1008번 지방도로를 따라 15㎞ 정도를 가면 박진교에 닿는다. 이 다리를 건너서 다리 밑으로 돌아 운암사에 오르는 샛길을 만난다.


 


운암사의 유래


 


행정구역상 부림면 경산리 837번지이며 성수산(聖壽山) 자락, 아늑한 비탈에 자리잡아 주변풍광이 마치 깊은 산속인 듯한 느낌을 준다. 절집의 내력은 현재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통일신라 애장왕 3년인 서기 803년 창건되었다는 얘기만 전 절집에서 전해 온다.


절집 이름의 유래도 마찬가지다. 운암사(雲巖寺). ‘구름바위 절’ 또는 ‘구름에 덮인 바위가 있는 절’ 정도로 풀이된다. 다만 사찰의 이름이 지금의 산신당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웅전 옆 산신당은 절 뒤를 두르고 있는 거대한 바위의 오른쪽 아래가 자연굴 모양을 하고있고 그 공간이 제법 넓어 별도의 전각이 없이 기도도량을 마련했다.


그런데 이 산신당 지붕격인 바위의 모습이 10m 남짓 되는 바위는 중간중간 몇 번의 굴곡을 이룬다. 그 굴곡의 움푹 들어간 자리에 난 드문드문 붙어있는 이끼와 잡초가 거대한 바위와 어우러져 거리를 두고 보면 마치 구름이 피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대가야의 요충지


 


운암사는 애시당초 이 기도처에 주변 지역의 할머니, 어머니들이 기원을 올리는 발길이 잦아지면서 절로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지역주민들은 운암사를 정통사찰이기보다는 산신기도도량으로 더 인식하는 분위기다.


운암사 인근은 가야고분이 산재해 있어 이 지역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운암사의 내력을 짐작케 해준다. 운암사 앞산 바로 너머 지정면 유곡리 백산마을 서쪽 기슭에는 400년대 후반 대가야 고분군이 있고 절 북쪽 박진교에서 세간삼거리 쪽으로 500m쯤 거리에서 북쪽 낙서로 가는 갈래길 입구 도로가에는 500년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경산리 고분이 있다.(물론 표지판은 없다. 보통의 무덤과 비석 몇 기가 서 있는 바로 옆 작은 동산처럼 솟은 것이 고분이다.)


이 고분은 인근 경산마을 뒷산 고분들과 함께 왜(倭) 양식과 비숫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출토된 유물로 비추어 대가야 또는 왜와 관련된 고위층 신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지금과 같은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 강은 오늘날 고속도로와 같은 기능을 했다. 북쪽으로부터 흘러내린 낙동강이 흐르고 남쪽에서 남강과 합쳐지는 천혜의 교통요지였던 이 지역이 예로부터 물산의 집산지이자 교류의 중심지로 번성했음은 보지 않아도 환한 이치일 것이다. 지금 박진교가 놓인 곳이 과거 박진나루터로 불리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관선 한 척을 두고 상시적으로 물자를 운송한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에서 이곳에 거주하던 부유한 가야인의 후손과 이곳을 오가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무운장수를 빌러 다니던 기도처. 그곳이 바로 운암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당시의 운암사는 꽤나 번성한 절집이었을 것이고 불교가 도래되기 전 가야시대로만 잡아도 거의 1천5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기도처인 것이다.


 


정성이 쌓여 인물을 낳다


 


주변 민가에서는 이곳 산신당에서 향을 사르고 촛불을 켤 때 그 연기가 굴속으로 삽시간에 빨려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연기가 그냥 퍼지면 백발백중 딸이라는 등 점술적 이야기와 기도 효력이 좋아 소원성취가 잘 된다는 속설이 퍼져 있다. 조용하고 운치있는 운암사의 분위기가 좋아 수시로 찾는다는 한 신도는 인근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게 된 것도 이곳 운암사에 옛날 옛적부터 어머니들의 정성이 쌓인 결과일 수 있다는 비약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실제로 운암사 인근지역은 가야인 악성 우륵의 고향인 옛 성열현(省熱縣)지역으로 역사적인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인접한 창녕출신을 제쳐두더라도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의 생가가 산너머 유곡면 세간리에 있으며 그 앞을 흐르는 유곡천을 조금만 올라가면 우리창남학교(사립)를 설립, 수많은 후학을 육성하면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면서 독립자금을 대던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한뫼 안호상 박사, 한말 우국지사이자 항일투쟁가였던 수파 안효제, 송은 안창제 형제의 자취가 남아 있는 입산마을이 있다.


그들의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들의 선조 어머니들이 동굴법당에서 누대에 걸친 지극한 정성이 바로 그들의 명성과 출세의 밑거름이었다는 얘기다. 한국의 어머니들이야말로 불교가 우리땅에서 대중종교로 깊이 뿌리내리게 한 일등공신이었다는 뜻도 된다.


 


토속신앙을 안은 한국불교


 


따지고 보면 불교가 우리에게 전래된 이후 토속신앙을 포섭, 동화하면서 민족종교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거쳤다. 유난히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특성상 샤머니즘적 산악신앙이 이미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뒤늦게 전파된 불교는 이러한 요소를 포섭하면서 민중불교로 터 잡을 수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도교와 유교적인 요소까지도 섞이면서 한국불교로서의 독자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고래의 산악신앙과 통일신라 하대 음양오행설, 풍수지리설, 천인감응설 등이 혼합된 풍수도참사상은 처음 왕도주변 평지에 걸립되었던 사찰을 풍치가 뛰어난 산속으로 옮겨 놓았다. 우리나라 절집에 산신각이 있는 것은 토속신앙 때문이며 칠성각이 있는 것은 도교의 영향이다. 삼성각은 산신, 칠성과 독성을 함께 모신 곳으로 우리 토속신앙과 도교신앙이 함께하는 곳이다. 독성은 홀로 선정을 닦아 성인이 된 나반존자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별도의 독성각을 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특성을 일부에서는 불교의 본고장 인도와 먼저 전래된 중국불교와 다르며 기복신앙과 미신적인 면이 다분하다고 하여 비난하지만 ‘귤이 회수를 지나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인도, 중국불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고유의 문화와 어울려 새로운 불교가 되는 것을 굳이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원리주의에 따른 지나친 처사일 수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형성될 당시에도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인도 고유의 토속적인 신앙과 사상을 토대로 하였으며 중국에서도 수많은 변용과 융합의 과정을 거쳤음은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도 분명하다. 그러기에 종교는 결국 관련된 지역, 인간들의 역사와 사상이 복잡하게 얽힌 문화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전쟁의 참상 속에서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라는 한국불교의 공통된 고난에 더해 운암사는 현대 한국사의 비극적인 한 장면을 더 간직하고 있다.


1950년 6·25전쟁 40일 후인 8월초 공산군의 전세에 밀린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낀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왜관-상주-영덕 전선은 국군이, 현풍-창녕-진동 전선은 유엔군이 맡아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중 이곳 박진지역에서도 북한공산군 최정예부대인 제4사단과 미군이 2주간에 걸쳐 생사를 건 혈전이 전개됐다. 8월5일 낙동강을 경계로 의령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공산군은 야음을 틈타 기습침투, 낙동강을 건너 영산면까지 침공했으나 미군은 이후 한달여간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여 공산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전세를 역전, 강을 건너 북진하게 된다.


이 전적을 기념하기 위해 2004년 강건너 창녕 남지읍 월하리에 박진전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 피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억울하게 산화한 혼령들이 저승으로 떠돌기 전 마지막으로 찾았을 곳도 이곳 운암사였을 것이다.


 


현재 운암사의 주지는 보문스님이다. 어렵게 통화한 스님과 운암사 취재의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사정상 항시 주재가 어려워 협조가 불가능하였다. 취재결과 정식신도회와 같은 조직도 없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방문객이 뜸한 절집인 듯 빈 절간에 백구 두 마리만 하릴없이 불청객을 반긴다.


그러나 절간은 독실한 신도가 매일처럼 보살피는 듯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요사채 한쪽, 앞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에 커피와 음료수, 과일까지 준비되어 찾는 이들을 배려한 정성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현봉․김창현 기자


 






전통사찰의 미래는 지역 속에서


 


‘불심없는 사하촌’은 역사적 후견인


 


기획특집 의령 누항애사를 마치며


 


전통사찰이란 전통사찰보존법에 의해 문화부장관이 지정하는 사찰이며 보존법에 따르면 그 사찰이 가진 역사적 의의와 문화적 가치가 그 지정기준이 된다. 현재 이러한 기준에 의해 의령지역에 전통사찰로 지정된 사찰은 수도사, 백련사, 유학사, 운암사 4곳이다.


세태의 반영이겠지만 우리는 흔히 ‘천년고찰’이라고 하면 유학사의 본사인 해인사나 수도사, 백련사, 운암사의 본사인 통도사처럼 뭔가 볼거리가 있거나 규모가 웅장해서 관광지가 되다시피한 절집을 먼저 떠 올린다.


이번 기획특집기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의령의 전통사찰은 전통면에서 직, 간접으로 유래를 더듬어 올라가보면 거의 모두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고찰이다. 그러나 그처럼 깊은 역사에 비례해 국보나 보물같은 고색창연하면서도 화려한 유물이나 유적은 제대로 찾을 수 없다. 설혹 있다하더라도 보관을 위해 국립박물관이나 대학박물관 대사찰의 성보박물관에 맡겨져 있을 뿐이다. 절집의 규모도 번듯한 일주문이나 근사한 석탑 하나 제대로 없이 소규모이고 법당과 부속건물도 근래에 새로이 중창한 것들이어서 눈으로 볼 만한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하지만 의령의 역사와 절집주변으로 눈을 돌리면 사찰과 혼연일체된 지역민들의 삶의 애환이 나오고 지역의 역사가 살아 숨쉰다. 절집의 깊은 연륜은 여기서 나온다. 그저 보이는 것에서만 찾으면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의 깨달음에서 현실은 부단한 생멸일 뿐이고 절집도 이러한 섭리에서 예외일 수 없다. 신라의 황룡사는 불 타 터만 남겼고 백제의 미륵사는 탑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다. 우리 역사에 장대하게 기록된 사찰 중에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절집의 위치조차도 찾을 수 없는 곳이 허다하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의령의 4개 전통사찰이 천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온다는 것은 흔한 말로 ‘부처님의 은혜’이다. ‘자업자득’이라는 주체적 불교교리에 충실하자면 신도들 그것도 ‘의령민들이 천년넘게 쌓은 공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과거를 접어두고 현재와 미래로 눈을 돌릴 때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바로 사찰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취재 중 만난 스님들과 신도회장을 비롯한 불교도, 일반인들의 생각은 다양하다. 자신을 수양하고 현실에서의 구원을 희구하는 종교성전이어야 한다. 지역사회와 일심동체가 되어 부처님의 자비를 적극 실천해야 한다. 문화 사랑방이자 지역민이 즐겨 찾는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등….


다양한 의견 속에는 의령지역 전통사찰들이 고민이 숨어있다. 현재 독립채산제를 실시하는 조계종 사찰 운영체제에서 재정적 여건 곤란을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찰에 부속된 부동산은 많지만 본사의 결의없이는 한 평의 땅도 처분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절집이 기업처럼 돈벌이에 나설 수도 없다. 정부의 지원도 한정적이다. 사찰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신도와 재정의 쏠림은 한국불교계 전체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에 지금 당장 시원스런 해결방도를 내놓은 수는 없다.


스님들 속설 중에 ‘사하촌(절밑 동네)에 불심없다’는 속설이 있다. 우리 역사의 어두운 시절, 스님이 머슴을 부리고 귀족처럼 생활하면서 근처 주민들에게 횡포를 부리던 때, 절집이 명화적이나 도적의 소굴이 되던 때, 일제가 시행한 사찰령으로 우리에게는 없던 대처승이 생기고 이들의 축첩과 육식으로 한국불교의 의미있는 전통이 사라졌던 때, 그리고 해방후 대처승과 비구승의 기나긴 싸움 등. 절집동네의 불심상실에도 이유는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미 보았듯이 의령의 전통사찰이 천년 넘게 소박하나마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사하촌 주민들의 정성’이 아닐까? 중생없는 부처가 어디 있으며 지역민없는 절집이 어디 있을까?


그러기에 의령 전통사찰의 미래는 무엇보다 의령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지역민과 함께 고락을 함께 하는 사찰, 그것이 이 지역 전통사찰의 과거였고 미래일 수밖에 없다.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2월 03일
- Copyrights ⓒ의령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많이 본 뉴스 최신뉴스
의령농협, 조합원 자녀 장학금 수여식..
의령 수월사 의령군장학회 장학금 300만원 기탁..
의령군가족센터 ‘의령박물관 및 충익사 탐방’ 진행..
의령교육지원청 진로 직업인 특강 올해로 3회째 열어..
의령홍의장군축제 성공은 `RED`에 있었네!..
의병마라톤 행사에서 함께 뛰며, 청렴봉사 활동 시간 가져..
의령소방서, 주거용 비닐하우스ㆍ컨테이너 화재 예방 당부..
오태완 군수 공약 평가...경남 군부 유일 2년 연속 `A등급`..
입식가구·생명박스·방역소독...의령군 경로당 `3종 세트` 호응..
의령군, 경남 드론측량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 수상..
포토뉴스
지역
"빛과 색으로 물들이는 도시"...의령군은 변신중 '의병탑' 영웅의 흔적 주제로 '홍색' 조명 설치 의병교 보행로·수변산책로 다채로운 '빛..
기고
김복근(국립국어사전박물관건추위 공동대표·문학박사)..
지역사회
최병진.전형수 회장 이.취임 최병진 회장, 재경 의령군 향우회장 감사패 수상 하형순 산악회 전 회장 공로패..
상호: 의령신문 / 주소: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충익로 51 / 발행인 : 박해헌 / 편집인 : 박은지
mail: urnews21@hanmail.net / Tel: 055-573-7800 / Fax : 055-573-7801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남,아02493 / 등록일 : 2021년 4월 1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유종철
Copyright ⓒ 의령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
방문자수
어제 방문자 수 : 4,711
오늘 방문자 수 : 3,244
총 방문자 수 : 15,768,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