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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늙은 단아한 아미타불의 절집

100년 앞서 ‘해인사 큰절’ 유래설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19일

산사음악회 등으로 대승교리 실천


 












의령의 최북단. 남해고속도로에서 의령읍을 거쳐 창녕 적교 쪽으로 20번 국도를 따라 20㎞쯤 가면 부림면 소재지(신반)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같은 도로를 따라 4㎞를 더 가서 여배리, 묵방리 쪽 마을길로 우회전해 산 쪽으로 3㎞를 더 들어간 곳. 그곳에 유학사가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는 창녕IC에서 내려 역시 20번 국도로 의령 쪽으로 14㎞를 가다보면 낙동강을 건너는 적포교가 나오고 이 다리를 건너 좌회전해서 4㎞를 더 가면 여배리 입구 오른쪽에 유학사 이정표가 보인다. 이쪽에서 오는 길은 이정표를 보고서도 찾기가 쉬운 편이지만 의령읍 쪽에서 오게 되면 초행자는 꺽어지는 길을 지나치기 일쑤다. 멀리서는 안내표지가 친절하지만 정작 지척에서 길을 잃기 쉬운 형국이다.


 


수묵화 속 절집


 


불교에서 서방정토를 관장한다는 아미타여래(미타)가 산으로 변한 미타산. 그 남쪽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두 개울이 합쳐지는 곳. 아미타여래의 품속인 양 아늑함과 청정함을 풍기는 자리에 터 잡은 유학사의 풍경은 계곡과 산 능선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유학사는 중창된 지 10년 안팎에 지나지 않지만 처음 대하는 길손에게도 마치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처럼 자연스럽고 고풍스러움까지 풍긴다.


유학사가 보여주는 자연과의 이 일체감은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인공의 요소를 드러내지 않은 세밀함에서 비롯된다. 우선 산비탈을 깎고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돌축대가 그렇다. 어른 몸통만한 바위부터 주먹만한 돌까지 자연석을 생긴 모양대로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축대에 연이어 절집의 계곡 쪽 측면은 같은 재료로 돌담을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축대와 담이 하나가 되게 했다. 돌계단을 올라 마당으로 들어서는 입구 양옆으로는 돌축대 위로 진흙과 암기와를 번갈아 쌓아 올리고 마지막에 지붕을 얹힌 어른 가슴 높이의 담장이 토속적이면서도 은근한 멋을 자아낸다.


아래편 돌틈 곳곳에서 소담스럽게 고개를 내민 황국의 샛노란 빛깔과 과 위쪽 토담을 얼싸 안은 담쟁이덩굴의 붉은 빛깔이 선명한 대조를 보이면서 색채감을 더한다.


 


아미타의 서방정토가 산속에


 


“절집을 보수하면서 원래 있던 담의 원형을 보존하고자 했습니다. 극락전 앞 축대를 쌓으면서도 일부러 주변의 돌들을 사용해 이질감을 없애고자 했죠. 한국의 사찰, 특히 산사는 주변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게 전통이 아니던가요?”


10여년째 유학사의 중창을 주도한 주지 원담스님의 절집에 대한 애정은 비단 절집의 중창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절집 주위는 수국, 붓꽃, 작약, 꽃무릇, 원추리, 비비추, 할미꽃, 구절초 같은 꽃은 물론이고 70여 그루나 되는 매화나무를 비롯해 연산홍, 천리향, 만리향, 살구나무, 무과나무, 느티나무, 감나무, 동백나무, 향나무, 산가래나무, 사과나무, 차나무, 산수유 같은 수목들을 정성껏 심고 가꾸었다.


때문에 유학사의 사계는 철따라 피고 맺는 꽃과 과일열매, 그리고 향기로 언제나 풍요롭다. 아미산 기슭에 아미타여래를 모신 절답게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꾸며보고자 하는 소박한 서원이리라.


 


유학사의 배롱나무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유학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흔히 백일홍, 자미화라고 불리는 배롱나무다. 유학사 극락전 앞에는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다. 아미타여래의 궁전 극락전을 호위하듯 서있는 두 나무 가운데 왼쪽은 하얀색, 오른쪽은 붉은색 꽃을 피운다.


배롱나무는 벌써 잎을 훌훌 벗어버리고 앙상한 맨몸을 드러내 놓았다. 표면은 매끄럽고 윤기가 나면서 우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사람의 손이 나무의 맨살에 닿으면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파르르 떤다고 해서 간지럼나무, 부끄럼나무라고도 불린다. 이 나무의 꽃은 7월부터 9월까지 100일 동안만 핀다. 그래서 백일홍이라 붙여졌고 꽃이 지면 곧 벼가 익는다고 쌀밥나무라고도 칭한다. 한여름 배롱나무가 피우는 꽃은 그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려하지만 기품있고 화사하지만 정갈하면서 깊이가 느껴진다. 절집에서 피는 백일홍. 불심 깊은 비구니스님의 미소를 닮았다고나 할까?


 


만발공양의 실천


 


유학사는 칠월칠석에서 백중 사이 이 배롱나무꽃이 만발한 때를 맞추어 산사음악회를 연다.


지역민들을 초청해 시낭송, 음악공연 등의 프로그램으로 더운 여름 농사일로 지친 지역민들에게 한줄기 시원함을 선사한다.


주지스님은 ‘문화에서 소외된 농촌주민들을 위한 작은 정성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사찰은 대중문화의 사랑방 역할을 해 왔었고 우리의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 바로 사찰’이라면서 ‘불법도량으로서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매년 동짓날이면 팥죽을 쑤어 인근 적교 삼거리를 지나는 행인과 운전자들에게 공양을 베푸는가 하면 삼재기도 때 신도들에게 받은 새 내복 모아서 기부하기, 사랑의 집에 장학금 전달하기 등 조용한 선행을 펼쳐오고 있다.


스님이 말하는 사찰이 간직한 전통과 역할, 그것은 <열반경>에서 ‘굶주리는 자, 병든 자, 가난하고 외로운 자를 돕는 공덕’의 덕목을 이르는 것이리라.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가 한국에서 대승불교로 만발하고 유교의 제사의식에까지 들어가 음식을 나눠먹는 음복문화까지 만들어 내고 만발공양(수많은 공양을 베푼다는 뜻으로 사찰이 일반인들을 위해 물질을 베푸는 사회적 활동을 일컬음)의 미덕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 주지스님의 기행(?)


 


내년이면 법랍 30년째로 접어드는 유학사 주지 원담스님. 1992년에 등단한 시인이며 고루한 관습을 깨치기로 주위에 명성(?)이 자자하다.


유학사에는 평소 낮은 스피커 소리로 불경이 나온다. 그런데 가끔씩은 절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리도 튀어 나오는 일도 있다. 언젠가 미타산에서 하산하던 일단의 등산객들은 일순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마땅히 불경이나 찬불가 정도가 흘러나오기 마련인 절집 스피커에서 때 아닌 외국음악, 그것도 샹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조그만 절 유학사에서 신도들의 불심함양과 수행정진을 위해 실시하는 108예참회에 개그맨으로 잘 알려진 한학자 김병조 교수 같은 저명인을 초청한 일화도 있으며 사월초파일에는 절 마당에서 노래자랑행사로 잔치로 베푼다.


하기야 절을 위해 지원을 마다 않는 지역 관공서 관계자들에게 불살생을 계율로 삼는 승려가 복날까지 챙겨 줄 정도의 파격(?)까지 마다 않는 스님의 만행은 기본교리와 정신은 철저히 지키면서 불경에만 메이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며 중생구제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해온 한국 대승불교의 발자취와 닮았다.


 


해인사 큰 절 ‘유학사’


 


유학사는 의령에 있는 4개 전통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해인사에 소속되어 있다. 1983년 합천군에 속해 있던 이 지역이 의령군에 편입된 까닭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예로부터 유학사를 ‘해인사 큰 절’이라 칭하며 부처님오신날 같은 불교명절에는 유학사를 먼저 들른 다음에야 해인사로 향했다.


이유인즉슨 ‘스님이 얼마나 많은 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쓸 때 배를 띄어야만 저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절인 해인사는 유학사보다도 100년이나 후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근거는 이러하다. 유학사는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이자 조선의 건국에 조력했던 당시 민중의 우상 무학대사가 1399년 창건했다. 창건 당시 무학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학이 머무는 자리에 지어 유학사라 칭했는데 절터를 정할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미타사가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자리인 점을 감안했다는 유학사 법당중수기 기록을 든다. 그리고 662년 왕의 부촉을 받아 미타산에 미타사를 창건했다는 인근의 순창 설씨 가문 전승설화, 여기다 미타산성 근처 미타사터로 추정되는 절터가 현존하는 점 등을 종합하면 무학대사가 800년 전 창건된 미타사를 계승하여 지금의 유학사를 창건하였으므로 소급하여 유학사는 곧 미타사라고 보아야 하므로 802년 창건된 해인사보다 100년 이상 앞서는 고찰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해인사 창건조사 순응스님은 원효의 후배인 의상대사의 4대 계승자이므로 유학사는 해인사의 큰 절임이 명약관화하다는 논리다.


 


기막힌 불상 봉안내력


 


이처럼 유서깊은 유학사도 폐사만 당하지 않았지 한국의 사찰들이 겪어야 했던 숱한 곡절을 겪어 왔다. 임진란 때 불타버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법당을 1690년에 새로 짓고 1780년에 종각을 지었고, 1789년 법당 중건, 1800년 중창, 1900년 경륜, 범해, 정선 세 스님의 노력으로 중수된 기록이 칠성각을 기금의 삼성각으로 옮기면서 발견된 상량문과 칠성각 현판에 남아있다. 그리고 1905년 칠성각 신축, 1935년, 1953년 중수, 1985년 만세루 중건,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원담스님이 극락전 중창, 칠성각 이전, 후불탱, 칠성탱, 신중탱 등을 조성해 오다 2009년 법당 단청을 완료했다. 극락전 현판은 입적한 석주스님의 글씨다.


원담스님이 새로 봉안한 극락전 아미타여래 금동삼존불의 봉안내력은 기막히다. 애초에 오동나무로 된 목조삼존불이 모셔져 있었는데 어느 날 불전을 청소하던 중 불상의 귀아래까 떨어져 나간 것이 발견되어 기왕의 목조불상들을 그대로 모사한 석고불상들로 대체되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다시 석고불상들을 그대로 본뜬 금동불상이 주조된 것인데 불상의 재료가 나무에서 석고로, 다시 금동으로 바뀌긴 했지만 모습은 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지역과의 일체감 ‘칠성계’


 


만세루 다리 건너 용왕각 뒤편의 승탑의 사연도 기구하다. 이 승탑 역시 양심있는(?) 도둑님에게 바꿔치기 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색이 창연한 기단 위에는 어이없게도 원래의 몸돌과 지붕이 일본풍의 것들로 대체되어 있다.


원담스님에 따르면 유학사에는 무학대사가 쓰시던 목탁과 영정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하나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리고 없다고 하니 천년 고찰의 흔적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유학사에는 그러나 칠성각에 줄줄이 걸려있던 현판이 30여개나 남아 있어 아쉬움을 달래준다. 대부분이 절집의 역사를 짚어볼 수 있는 중수기이거나 지역주민과 사찰과의 교류관계와 사찰의 역할을 확인하는 칠성계 현판이다. 이중 칠성계 현판은 칠성당을 건립 또는 중수할 때 시주한 계원들의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몇십년 전의 현판에는 지금도 누구인지 알만한 지역유지들의 이름도 있다.


사찰계는 사명대사가 한 절안의 승려끼리 12지에 따라 반으로 나눠 나이별로 조직한 갑계를 원류로 본다. 목적에 따라 등촉계, 문도계, 불량계, 상포계, 염불계, 지장계 등으로 나뉘어지며 주로 사찰의 발전을 위한 스님, 신도들의 모임을 일컬었다. 유학사 현판에 나와 있는 칠성계는 칠성당의 유지, 보수 등을 위한 계모임으로 도교와 연관된 민간신앙을 불교에서 포용한 결과 나타난 것이 칠성당이므로 이와 관계된 다수의 현판이 현존하는 것은 유학사와 인근 주민들의 활발한 상호교류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증표라 할 것이다.


 


유서깊은 미타산


 


산 능선 입구에 자리한 유학사에서의 조망은 여느 절과 달리 아래로의 풍경보다 삼선각에서 미타산 정상쪽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풍광이 백미다. 662m의 그리 높지 않은 미타산이건만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산의 자태는 문자 그대로 아미타여래의 모습을 대하고 있는 양 장엄하기까지 하다. 뾰족하고 기기묘묘한 큰 바위하나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만한 곡선이건만 눈앞을 호쾌하게 막아서는 산의 자태는 태산의 위용이 저러하리라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미타산은 삼국시대 주도권을 다투던 백제와 신라가 빼앗고 빼앗기던 군사적 요충지로 김유신 장군과 백제군이 격전을 벌였다는 성열성으로 추정되는 경상남도기념물 미타산성지가 얼마 전 복원되어 산 정상 바로 아래 2㎞ 가량 뻗어져 있다. 의령에서 합천, 창녕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해서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으며 지역의 중심지인 신반리에는 역참인 신흥역이 있었다. 하현봉 김창현 기자


 


유학사 정숙이 신도회장


 


남 위한 봉사는 곧 나를 닦는 일


절이 자리잡아 가는 것 같아 기뻐


 


“천년고찰 명성이 부끄러울 정도로 쥐와 벌레가 들끓고 동네놀이터 같던 옛날 유학사가 지금은 사월초파일 쌀 2~3 가마니가 모자랄 정도로 인근 부림, 봉수, 낙서면과 창녕, 합천은 물론 멀게는 강원도 속초에서도 신도들이 찾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7년째 유학사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정숙이 신도회장(63)은 지난 10여년을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은 말투로 오늘의 유학사는 오직 지금 주지스님의 공덕일 뿐이며 자신은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했다고 겸손해 했다.


매일 새벽 4시에 108배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저 절이 좋아 몇 년 전까지 문경 봉암사, 설악산 오세암 같은 깊고 험한 산중의 절들을 틈만 나면 많이도 찾아다녔다는 김회장은 작은 절 신도회장 역할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그저 내 마음을 닦는 일일 뿐”이라고 한마디로 대답한다.


시어머니를 따라 처음 유학사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어언 30여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쌓인 불심과 자기수양이 탄식 한번 없이 부림면 적십자회장을 비롯한 어려운 사회봉사활동을 신명나게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을 것이라는 것이 평생을 함께한 부군의 분석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번 오게 되면 절집분위기와 스님에게 반해 다시 찾는 신도가 하나둘씩 늘어날 만큼 유학사가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 기쁘다.”는 김회장의 환한 웃음이 눈부시다.


단아하고 고요한 산사의 분위기를 간직한 유학사 경내.


유학사를 감싸고 흐르는 개울.


고풍스런 멋을 풍기는 담장을 붉게 물든 담쟁이 넝쿨이 타고 있다.


유학사 입구 왼쪽으로 오르는 돌계단. 돌석축은 돌담으로 바로 이어진다.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이자 격전지였던 미타산성.


극락전 앞 배롱나무가 만개한 여름철의 모습.


용궁각 뒤편 승탑. 오래된 기단 위로 누군가 일본풍의 몸돌과 지붕을 올려놓았다.


칠성각 상량문 현판. 유학사의 역사와 당시 사정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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