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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당 호연지기 길러낸 의령정신의 산실

의령 누항애사 순례 2 (자굴산 정기잇는 백련사)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04일

황홀한 별천지가 바로 눈 앞에


세상사 덧없음 증거하는 보리사지


 












자굴산. 의령의 진산(鎭山)이자 영산(靈山). 백두대간이 남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굽이치면서 거창 금원산, 합천 황매산의 높은 봉우리를 만들고 한우산에서 잠시 한 숨을 돌린 뒤 남은 진력을 다해 빚은 산. 백두대간의 한 줄기 진양기맥은 최후의 걸작 자굴산을 뒤로 하고 만족한 듯 진양호에서 숨을 거둔다.


그 자굴산 동쪽 가파른 비탈에 자리잡은 백련사(白蓮寺)는 서부의령의 법맥(法脈)을 유일하게 이어 오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의령군 가례면 개승리 792번지. 의령읍에서 의령버스터미널을 100m쯤 지나 우회전, 1037번 도로를 따라 7㎞ 정도 가다 좌회전하면 자굴산을 한 바퀴 도는 자굴산관광순환도로이다. 이 도로를 따라 경사길을 1㎞쯤 가다 좌측에 백련사로 푯말이 나온다. 여기서 구불구불하면서 좁은 급경사 시멘트포장길을 1.5㎞ 아슬아슬하게 오르면 백련사 주차장에 다다른다.


 


일망무제, 백련사의 풍광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탁 트인 전망. 백련사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호쾌함이 절집에서 으례 가지게 되는 엄숙함보다 먼저 찾아든다.


해발 897m, 자굴산 정상에 뿌려진 오색물감은 계곡과 능선을 타고 어느새 절 아래 저만치까지 흘러내려 울긋불긋 숲을 물들이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색동저고리를 입은 어린 아이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노는 듯, 솜씨좋은 장인이 절집 단청을 그침없이 그려 나가듯 눈이 부시다. 화려한 색의 잔치가 벌어지는 산자락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이번에는 자굴산과 한우산이 아늑하게 품은 가례고을의 풍요로운 가을이 금빛으로 빛나고 그 너머 의령들판과 남강, 함안 법수면 들판이 나지막한 산자락 사이로 부끄러운 새색시처럼 살포시 볼살을 드러낸다.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를 어디서 찾는다는 말인가? 부처는 내 안에 있고 황홀한 별천지가 바로 눈 앞에 있거늘.


 


세지보살의 비밀


 


몇 년 전 새로 지은 대웅전에는 여타 절집과 달리 석가모니불 대신 세지보살이 좌정하고 있다. 원래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곳이고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곳인데 아미타여래를 보좌(협시)하는 세지보살이 대웅전의 주존으로 모셔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이 세지보살 또한 본래 백련사에 모셔진 것이 아니다. 이 목조불상 안에서 나온 복장유물에 따르면 1703년 경상북도 자인의 반룡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의 협시보살로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 보살이 과연 어떠한 연유로 멀리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밝혀지지 않아 신비감을 더한다. 이 보살은 현재 문화재청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지정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사채의 툇마루


 


대웅전 오른쪽 새로 지은 요사채는 우리 고유의 고풍스런 맞배지붕에 툇마루를 내어 지은 아담한 자태가 주변풍광과 어우러지며 산사의 분위기를 그윽하게 하고 있다. 새로 지은 절집이 오래된 건물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묘한 매력을 풍긴다. 홀로 절을 지키는 주지스님은 여름밤 이 툇마루에 나와 누워 밤하늘 별을 보면서 그야말로 무아의 경지로 빠져든다고 한다. 백련사에서 옥의 티는 절마당 아래 주차장에서부터 이 요사채의 풍광을 가로막으면서 서 있는 2층 건물이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지어진 이 건물의 2층만 없었더라면 절집의 풍광은 그 어디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대웅전과 요사채 사이에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를 줄을 모른다는 물줄기가 실하게 흘러 나온다. 절 주위가 경사가 워낙 심한 지형이라 내는 보이지도 않고 어디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쉼없이 흘러나오는지 궁금하다. 자굴산 반대쪽으로는 물이 귀한 반면 이곳으로는 늘 물이 넘치는데 아마도 수맥이 이쪽 비탈로 통하기 때문인 것 같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한때 군에서 이곳에 생수공장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하다 주민반대로 무산되었다는 내력도 덧붙인다.


 


자굴산 마지막 고찰


 


수려한 산세와 정상에 오르면 지리산, 합천 황매산과 가야산, 마산 무학산, 거창 덕유산 등 사방으로 막힘없는 풍광, 주변 지역의 넉넉한 살림살이로 인해 자굴산은 예로부터 크고 작은 절이 많았었다고 전해진다. 백련사 주지스님은 지리산, 재약산과 더불어 자굴산은 무속인들 사이에서 경남의 3대 신선산으로 알려져 절집처럼 꾸미고 무슨무슨 ‘암’이라는 현판을 건 사이비 절집이 근래까지 골짜기마다 산재해 있었다고 귀뜸한다.


백련사는 지금으로부터 700여년 전인 1317년 고려 충숙왕4년, 부설거사가 창건하고 1893년(고종 30)에 주선스님이 중창한 일이 알려져 있을 뿐 별다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백련사는 얼마 전까지 백련암으로 알려져 있던 절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지금의 백련사는 그 옛날 어느 큰 절에 딸린 작은 절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근처에 백련사보다 오래된 절은 한 곳도 없다. 그러기에 오직 주변 사적과 정황을 참작한 추측으로만 지금 백련사의 본 절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인데 그 추리의 마지막에 보리사가 있다.


조선 중종대인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자굴산의 큰 절로 양천사와 보리사를 들고 있다.


양천사와 보리사는 모두 현재의 가례면 내에 있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남북 일직선상으로 맨 아래쪽에 양천사, 중간에 백련사, 맨 위쪽으로 보리사가 위치해 있다. 양천사는 그 내력을 찾아볼 길 없는 절이고 현재 운암리 자굴산 중턱 양천사가 있었다는 자리는 절의 표시조차도 없는 폐허이다.


또한 자굴산관광도로에서 백련사로 들어오는 반대쪽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좁은 찻길이 하나 나있고 표지판에는 아자촌을 통과하는 오르막길 중간에 금정사라는 조그만 절집이 하나 있다. 이 절은 최근에 생긴 절이고 이곳 바로 왼쪽이 ‘금정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터인데 이 곳 역시 절집이 있었던 흔적이나 기록을 찾기 어렵다.


보리사지의 적막


 


갑을리 경남학생교육원 옆에는 보리사터가 자리하고 있는데 역시 잡초와 칡넝쿨만 울창한 폐허로 버려져 있다. ‘버려져 있다’는 표현이 적당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보리사터야말로 세월의 무상함, 세상사의 덧없음, 불타의 오묘한 깨우침을 역설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가례고을을 흐르는 개울의 이름을 백계(白溪川)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구전에 의하면 한 때 8개의 선방과 9개의 암자를 거느릴 정도로 번성하던 보리사의 쌀씻은 물이 개울로 흐를 때면 개울물의 색깔이 우유처럼 하얗게 변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의령의 긍지 망우당 곽재우가 15세때 이 보리사에서 학업에 정진했었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으며 1948년 5월 여기에서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어 1982년 보물 제731호로 지정되고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처의 나라’를 자부하던 신라, 불교를 국교로 운명을 같이하던 고려를 건너 누백년 동안 영화를 누리던 보리사도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의 불교억압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일까?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리사는 그러나 절집이 없어지게 된 유래나 사연이 전혀 전해지는 바가 없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1997년 마지막날 경상남도 기념물 제190호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석 뒷면에는 대략 300년전 쯤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는 문구만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1천500여평 정도의 넓은 절터, 규모 높이 2m, 길이 40m의 석축, 근래에 까지 남아 있던 석탑과 부도, 절집의 기초로 쓰던 장대석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빈 절터는 을씨년스럽기까지하다. 게다가 도무지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옛절터는 길가에 표지판 하나 없이 최근 바로 옆에 지어진 ‘기 수련원’에 가려 안내문과 표지석조차도 물어보지 않고는 찾기 힘들 지경이다. 이렇게 방치할 요량이면 왜 굳이 번거롭게 도기념물로 지정했는가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백련사와 역사적 인물들


 


어쨌든 보리사가 스러진 이후 백련사가 본 절의 역사를 이어 받아 몇 백 년 동안 서부 의령 지역 민중의 도량으로서, 정신적 지주이자 위안처로서 소임을 다해 온 것이다. 자굴산과 가례고을, 보리사, 백련사는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퇴계 이황, 대학자 남명 조식, 망우당 곽재우가 등장하는 한 찰나의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그 기나긴 역사에서의 그 짧은 순간이 의령지역민의 머리 속에 깊이 아로새겨 지면서 지역의 정신으로 남아 오늘에 전한다. 그 속에는 한민족의 정신문화에 깊게 뿌리내린 불교역사와 사찰 흥망성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세 사람의 인물 가운데 가례와 가장 먼저 인연을 맺은 인물은 퇴계 이황, 이황은 스물 한 살 때 가례고을 진사 허찬의 무남독녀에게 첫장가 들어 무시로 처가를 방문하면서 지역민과의 교류도 잦았다. 물론 이 지역 대지주의 일원으로 주변 사찰에도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부인과 7년후에 사별하면서 장인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면서는 이 지역 지주의 한 사람이기도 했기에 의령지역 정신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옛부터 풍속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의 지금 가례(嘉禮)의 지명과 쇠목재에서 내려다 본 경치가 ‘산자락은 갑옷같고 내는 새의 모양’이라 하여 갑을(甲乙)이라 지금의 갑을리 지명을 지었다. 처가터에 이황의 글을 바위에 새겼다는 ‘가례동천(嘉禮洞天)’(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과 선생의 덕을 기리는 유허비가 있고 1657년 의령현감 윤순거가 현재의 의령읍에 덕곡서원을 세워 지역 학문과 문화의 한 축이 되었다.


 


남명과 명경대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동갑으로 두 사람은 33살 되던 해 치러진 향시에서 경상우도와 좌도에서 각각 1등을 했지만 남명은 대과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몰두한 반면 퇴계는 대과에 급제하여 화려한 관직의 길로 들어선다.


자굴산 고개 넘어 합천 삼가에서 태어난 남명은 과거공부보다 정통유학과 제자백가, 노장사상, 불교사상을 두루 섭렵하여 학문의 폭이 넓은 인물로 20대 후반에 의령과 연을 맺는다. 남명은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제거하는 기묘사화로 작은 아버지 조언경을 여의고 아버지마저 관직에서 파직되어 이내 세상을 떠나자 5살 때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와 3년상을 치르면서 자굴산 명경대에 자주 오르고 명경대가 보이는 절간에서 학문에 정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남명이 머물렀던 곳이 어느 절인지와 명경대는 과연 자굴산 일대 어떤 바위를 지칭하는지가 정확히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 남명을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지금껏 의견이 분분하다.


 


망우당, 뜻을 세우다


 


망우당전서에 망우당이 15세에 보리사에서 수학하였으며 근처의 명경대에서 휴식을 취한 것으로 나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참작하면 20대의 남명과 10대의 망우당은 아마도 같은 공간을 향유하였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망우당은 남명의 후학이자 외손녀사위라는 인척간인데 나이는 51세의 차이가 난다. 남명이 16살의 망우당을 손녀사위로 정했다고 전해지니 그때 남명의 나이 그때 67세. 스승이 젊은 시절 고뇌와 번민과 정진의 시간을 보냈던 방법을 어린 망우당이 따랐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이치다. 그렇다면 남명과 망우당이 기거했던 절집은 어디일까? 기록에서처럼 지금의 보리사지에 있었던 절집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본 절 특히 당시 보리사처럼 번화한 절이라면 학업을 닦기에는 적절치 않다. 또한 보리사지 근처에는 명경대라고 칭할 만한 바위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남명과 망우당이 거처한 곳은 명경대가 근처에 있는 보리사 소속 암자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인데 명경대(明鏡臺)는 불교에서 저승의 입구에서 이승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업을 비춰보는 거울이다. 금강산 명경대가 가장 유명하며 청계산, 불영계곡, 단양 증선암계곡 등에도 있다. 거울처럼 반듯한 면을 가진 바위에는 흔히 이런 이름이 붙어 있다. 남명이 지은 ‘명경대’라는 한시가 두 수 전하는데 그 내용이 노장사상까지 가미한 자뭇 호쾌하여 시의 내용과 명치에 걸맞은 바위는 모두 자굴산 정상 근방과 동쪽에 몇 개가 있다.


이 가운데 현재 백련사 산령각 옆에 있는 바위와 절 뒤쪽 자굴산 9부 능선 비탈에 서 있는 바위가 가장 유력해 보이며 백련사가 보리사의 암자였음을 가정한다면 두 사람의 거처가 백련사였다고 하더라도 기록과 어긋남이 없어 보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 역시 백련사를 포함한 지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서릿발 선비기상 의령정신으로


 


억불숭유정책을 펴던 조선시대이기는 하지만 당시는 아들 명종 대신 조선을 쥐락펴락하던 문정왕후가 강력한 호불정책을 펴던 때였다. 조선의 사찰에는 고마운 인물이었지만 남명에게는 눈엣가시였다. 퇴계의 추천으로 관직을 하사하는 명종에게 사양하는 소를 올리면서 국정을 농단하는 문정왕후를 ‘한낱 과부’로 극렬하게 비방하여 곧은 선비의 기상을 널리 알렸으며 그 서릿발 같은 기상은 후학 망우당과 정인홍에게도 전해져 훗날 두 사람의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그런 인물들이 호연지기를 길렀던 곳이 바로 백련사였던 것이다.


그런 정신적 유산이 이어져 일제시대 백산 안희제와 같은 독립투사를 배출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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