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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에서 깨진 원효 구한 ‘깨진 바위’ 전설

의령 누항애사(陋巷愛寺) -1 다시 서는 천년고찰 수도사(修道寺)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04일

대사에 대한 민초의 애정 반영
도문화재 청동향료 반출 묘연


 












한국사찰의 역사는 곧 한국의 역사다. 불교는 삼국시대 처음 전래된 이래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기도 하고 유교가 국시가 되기도 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단으로 몰려 억압을 받기도 했다. 역사의 우여곡절을 함께 한 불교. 그 굴곡의 자취는 사찰에 오롯이 남아 있다. 특히 지방의 사찰은 민초들의 고난한 삶이 진하게 배어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본사에서는 4회에 걸쳐 의령민의 숨결과 애환이 깃든 전통사찰을 찾아 사찰에 얽힌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돌아보고 지역사찰의 현재적 의미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수도사는 의령읍에서 정북 6㎞쯤. 태백산에서 서남쪽을 향해 달리던 소백산맥이 정남향 지류를 이루는 우봉지맥의 끝자락인 신덕산(神德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 363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산 통도사의 말사이다.


의령읍에서 20번국도를 타고 신반, 창녕쪽으로 2㎞쯤 가다 교암입체사거리에서 좌회전, 10분 정도 달리면 이목저수지가 나오고 저수지 중간쯤에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골짜기 안 1㎞ 남짓 거리에 수도사가 있다. 남해고속도로에서는 군북IC에서 79번국도로 의령쪽으로 5㎞쯤 가면 검문소를 지나 처음 만나는 교차로가 백야오거리인데 여기서 신반,창녕쪽 우회전하는 국도20번 도로를 타고 5분쯤 가다보면 교암사거리에 다다른다.


 


산사로 가는 길


 


이목저수지에서 수도사 경내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산사로 가는 길이다. 왼쪽으로 경사가 심한 산비탈을, 오른쪽으로는 좁은 계곡을 일군 논밭을 끼고 몇 번인가 산모롱이를 돌다 보면 보일 듯 보이지 않던 절집의 전경 한 자락이 시야에 잡힌다.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지만 옛날 이 길은 한두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었을 것이다. 수도하는 선승들이 바랑을 지고 사색에 잠겨 오가던, 인근 마을 여염집 중생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부처님께 발원하기 위해 마음을 정갈히 하며 오르던 호젓한 산길이리라.


산사를 찾아가는 길은 절에 들어서기 전 흙길을 두발로 걷고 돌부리에 발이 채이기도 하면서 힘들게 오르는 동안 숲바람과 계곡물에 묵은 상념을 씻어 버리는 통과의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걸어서 30분 이상은 걸렸던 이 길이 승용차로 5분이면 수도사 코앞에까지 닿는다.


편리함을 추구하며 잃어버리는 것은 길만이 아니다. 수도사 주차장은 상하로 2곳이 있다. 위쪽 주차장은 절집관리와 운영의 편의를 위해 절집과 바로 통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 주차장은 절을 찾는 일반신도 및 방문객들이 극락교를 건너 경사진 길을 올라 만세루를 통해 절집을 들어 올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었으나 대부분의 방문객과 신도들은 위쪽 주차장을 이용해 곧바로 절집에 들어선다. 이래서는 절집을 찾는 아무런 묘미가 없다.


우리 조상들은 절대자의 공간, 절집을 찾는 사람들이 자세를 낮추고 경건함을 가지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지혜를 짜냈다. 절집의 표시인 당(幢)을 높이 단 것에서부터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으라는 의미의 다리와 일주문, 위협적인 사천왕상이 그러하다. 또한 누각의 아래를 통과하면서 돌계단과 그 너머 높은 단위에 위치한 대웅전을 올려다 보게 만드는 절집의 구조는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정착된 것이다.


수도사는 아래 주차장에서 극락교를 건너 만세루를 지나고 돌계단을 올라 극락전을 드는 경로를 통해 절대자를 찾는 중생의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고 있다.


 


수도사 창건전설


 


수도사는 지금으로부터 1,350년전인 신라 문무왕 2년인 서기 662년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원효가 절 위쪽 병풍바위에서 깨달음을 얻고 100명의 스님들과 함께 수도한 인연으로 절 이름을 수도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병풍바위는 수도사 위쪽 신덕산 정상아래에 있으며 높이가 5m, 폭이 20m쯤 되는 바위로 멀리서보면 마치 병풍이 세워진 모양을 하고 있으나 현재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전체의 모습을 제대로 조망하기 어렵다.


수도사의 창건자 원효는 남부지방 특히 신라의 주영토였던 지금의 경상남·북도 지역에서 많은 절을 창건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며 유서가 깊은 절치고 원효가 등장하지 않는 절이 드물 정도다. 원효와 관련된 절 창건 전설은 비슷한 골격이 있다. 이 가운데서도 내원사를 비롯한 양산 천성산(千聖山) 일대 무려 100여개의 사찰과 암자에 공통된 창건내력이 가장 대규모로 유명하다. 이른바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救衆)’이라는 것이다.


 


수도사 창건 11년 후인 서기 673년(문무왕 13년) 원효대사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불광산 석판암을 창건해 수행하던 중 당나라의 태화사(太和寺)가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예상하고 커다란 판자에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하노라(曉擲板救衆)’라는 글을 써서 태화사로 날려 보냈다. 태화사에 모였던 1천 명의 대중이 공중에 또 있는 판자를 보려고 법당에서 밖으로 나온 순간 뒷산이 무너지면서 법당이 무너졌다. 이 인연으로 1천 명의 중국스님이 신라에 와서 원효대사의 제자가 되었고 산신의 인도로 지금의 내원사 산령각 입구에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상·중·하내원암을 비롯한 89개 암자를 세우고 1천 명의 스님을 깨우쳤다.


 


원효의 일대기인 ‘송고승전(宋高僧傳) 제4권 원효전’에 나오는 ‘척판이구중(擲板而救衆)’이라는 다섯 글자에서 유래된 이 전설에 의해 원적산(圓寂山)이던 산의 이름도 천성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깨진 덤 마개’


 


수도사 부도밭에서 위쪽으로 1.5㎞쯤 떨어진 신덕산 중턱 등산로 옆에는 키가 2m 남짓하고 폭이 7m 정도 되는 바위의 가운데가 한 뼘 이상 벌어진 채 서 있다. 수도사 근처에서 수도하던 원효대사를 호랑이 한 마리가 뒤에서 덮치려 하자 근처에 있던 바위 하나가 큰 소리를 내며 저절로 반으로 갈라지면서 위기에 처한 대사를 구해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를 ‘깨진 덤 마개’라고 한다는데 ‘덤’은 경상도방언으로 ‘바위’란 뜻이고 ‘마개’는 ‘막다’는 뜻이므로 ‘깨진 바위가 (대사의 위험을) 막아준 이야기’ 정도의 뜻일 것이다. 원효대사를 우상처럼 떠받들던 당시 민중들의 애정이 서려있는 전설이다.


한편 이 기특한 수호신 바위를 두고 또다른 설화도 전해진다. 한때 수도사가 번창일로를 걷고 있을 때는 통도사와 해인사 등 큰 절에 쌀을 대 주기도 하고 수많은 방문객들로 북새통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처사가 일러주길 신덕산 중턱에 있는 이 바위를 반으로 깨버리면 절이 조용해질 것이라는 귀뜸을 듣고 수도사 식구 하나가 바위를 쪼개자 줄을 잇던 손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버리고 이후로 절은 쇠퇴일로를 걸었다는 전설이다.


수도사의 사세(寺勢)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일제강점기인 1923년 1월23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에는 ‘이 포교사의 전별’이라는 제목의 단신이 하나 실려 있다.


‘삼십본산 양산통도사 창원포교당 이포교사가 창원에 부임한지 5년만에 4백명의 신도를 모집하는 성과를 이루고 의령수도사로 발령이나 떠나면서 성대한 전별연이 배풀어졌다.’는 내용으로 1900년대 수도사의 극락전이 지어진 사실과 연관시켜 추측컨대 이 당시 수도사는 적어도 창원포교당 정도이나 그 이상의 교세를 이뤘을 것으로 보인다.


 


수도사의 중창


 


1.300여년 긴 세월을 품은 고찰에 어찌 고비가 없었을까? 조선시대 세종2년(1420) 국률, 정암,유곡 스님 등이 중창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여러 전각들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사명대사 유정이 다시 중창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의 위쪽 주차장 자리에도 절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대 초부터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태풍으로 쑥대밭이 된 개울가 축대를 다시 쌓고 개울을 건너는 극락교를 새로 놓는 등 공사를 벌여 오다 이달 초 극락전에 아미타불 팔대보살 탱화 점안식을 거행함으로써 몇 년 동안 계속된 사찰중창을 일단 완료했다.


절의 중심건물인 극락전은 전의 건물을 최근에 확장보수하여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면적이 넓어졌다. 그러면서 극락전과 산신각 사이에 있던 칠성각을 뒤쪽 비탈로 올려 새로 지었다.


절 입구에서 극락전 왼쪽에 있는 요사채가 주지스님 등이 거처하는 곳이며 반대쪽 요사채는 과거 고시생 등이 학업에 정진하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만행하는 스님들을 비롯한 특별한 방문객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극락전 앞 투박하게 생긴 사람키보다 조금 더 높은 투박한 4층석탑이 하나 서 있다.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탑은 삼국시대에 세워진 것을 고려시대에 보수한 것이라고 하나 여러 석재를 부조화스럽게 조합한 뭉툭한 모습이 어찌보면 부담스럽고 어찌보면 그저 범부의 서툴지만 정성들인 솜씨라고 느껴져 정감이 간다.


부속건물로 왼쪽 요사채 앞쪽에 식당건물, 그 옆으로 화장실이 있는데 절집의 풍광을 저해하는 부작용이 있어 정비가 요구되지만 여러 사정으로 미뤄지고 있다.


 


청동향로의 행방


 


수도사의 문화재로는 2005년 1월 13일 경남유형문화재 제417호, 418호로 각각 지정된 극락전 석조아미타여래삼존불상과 복장유물, 감로탱(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이 있으며 만세루에서 개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왼쪽 산기슭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된 부도밭이 나온다. 주지스님에 따르면 1970년대가지 이곳에는 50여기의 부도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10여기의 조선시대 부도만이 남아 있다. 나머지 40여기는 아마도 고관대가집 정원석으로 반출되거나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도사 문화재로 다른 곳으로 반출이 확인 되는 것이 하나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된 청동은입사향로인데 현재 경남 고성군의 고찰 옥천사의 유물전시관인 보장각에 전시되어 있다. 1816년(순조16년)에 만들어 진 이 향로는 입구 은저리의 안쪽에 ‘의령수도사’라고 새겨져 있어 원래 수도사에서 쓰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향로가 고성까지 흘러 들어간 사연과 유래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어 상상력을 자극하게 한다.


 


수도사 계곡은 용덕면 내 용덕초등학교, 덕암초등학교 뿐 아니라 유곡면 송산초등학교와 산너머 가례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소풍을 나올 정도로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물이 맑은 곳이다. 만세루 누각에 올라 계곡아래를 굽어보면 양쪽 산등성이 사이로 나타나는 들판의 풍경이 무척이나 시원스럽고 아름답다.


주지스님에 따르면 수도사는 중창불사가 거의 끝난 올해 부처님오신날 행사에 1천여명 이상의 불자와 방문객들이 찾을 정도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신도회장은 지역의 사찰문화를 익히고 홍보하는 장으로써 지역민과 도시인을 대상으로 한 탬플스테이 같은 프로그램을 사찰사업으로 검토해 보는 것도 전통사찰 수도사가 새롭게 지역사회에 자리매김하는 한 방안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하현봉․김창현 기자>


 


본 기사는 2011년 경상남도의 지역신문 기획취재부문 선정작으로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수도사 주지 중본스님


 


사찰은 그 자체가 문화


편안함과 위안주는 곳


 


“흥망성쇠가 무수히 반복되는 세상사에서 폐사되지 않고 천년 이상을 이어왔다는 것 자체만 해도 감사할 일입니다.”


천년고찰이라는 말만 듣고 찾아왔다 명산고찰처럼 고색창연한 문화재 한 점 제대로 볼 수 없는 절집에 실망하는 방문객이 많다는 말에 대한 반응이다. 중본스님의 반응이다. 2008년에 수도사에 와서 올해로 3년째 수도사 주지를 맡고 있는 중본스님은 지역사찰은 그 자체가 지역의 문화라는 인식을 가진다면 눈에 보이는 화려한 유물과 고색창연함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현대사회에서의 사찰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수행과 실천은 하나여야 한다면서 사찰의 사회성을 강조한다. “지역민의 언제든 찾아와 마음의 위안을 얻고 생활의 활력을 충전시키는 장소가 지역사찰의 기본적인 소명이며 여기에 그치지 말고 산문 밖으로 나아가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면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수도사의 샘물을 예로 든다.


예전부터 절 밑 마을 사람들이 가뭄 때는 여기 샘물을 식수로 떠 가고 목욕도 하러 올라오곤 했다는데 그런 모습이 지역민과 사찰의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스님이기에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는 빠짐없이 참석하는 활동파 스님으로 알려져 있지만 말 못하는 고민도 있다. 베풀고 싶은 욕심 아닌 욕심(?)을 빠듯한 절집살림 때문에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것이다.


“수도사는 마치 어머니의 품속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이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전완수 수도사 신도회장


 


최근 절집 중창에 앞장


재정적 어려움 안타까워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수도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극락전과 요사채는 새는 비를 막느라 임시로 천막을 덮는 지경이었고 절 주변도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다 2002년 전국을 휩쓸었던 태풍 ‘매미’로 불어난 개울물은 수도사를 거의 폐허로 만들고 말았다.


아래 동네 덕암초등학교 다닐 적 단골소풍장소였던 수도사를 중년의 나이에 찾았다 당시 어려운 형편을 외면할 수 없어 인연을 맺었다는 전완수 박사(57)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신도회장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다.


“정부와 도, 군의 지원금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느라 발품을 팔던 때가 엊그제만 같습니다. 전임 주지 도광스님의 열정과 몇몇 관심 있는 분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습니다,” 수도사의 몇 년간에 걸친 중창과정에서의 어려움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자리 잡으면서 뭔가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고 싶었던 전박사의 선택은 대학시절 전국학생불교총연합회 부회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신실한 불교도였던 그에게 수도사의 재건을 위한 봉사는 업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도사 일을 보면서부터 지금까지 매일 새벽 108배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불교를 실천하게 되었다는 전 박사는 “어려운 절집형편에 큰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면서 “지역의 역량있는 분이 앞장서 정식으로 신도회를 활성화함으로써 수도사가 지역민의 자랑거리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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