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신문은 2011년 신묘년 새해부터 우리지역의 땅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에는 설화 전설 민담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의령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지역민들의 정서를 환기시키는데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자료는 의령문화원에서 발행한 ‘의령의 구비문학’ ‘우리고장 땅이름’에서 전재하기로 했다. 의령신문은 지난 1월 25일 강홍석 의령문화원장을 예방해 이러한 내용을 전재하는 데 따른 양해를 사전에 구하는 절차를 밟았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의령군청 뒤에 있는 나직한 산이 봉덕산(鳳德山)인데 지금에는 봉무산(鳳舞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봉황새가 날개를 편 채 성안 내삼동을 감싸고 있는 지형이고 마주보고 있는 남쪽의 산이 안산 격인데 구룡산(龜龍山 : 지금은 九龍山으로 적고 있다)이라 동서의 부드러운 산줄기 등 청룡백호에 주산과 안산을 잘 갖춘 명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군청 동쪽 산자락 부근을 왕뒤(왕띠)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러가지 주장이 있어서 상노인분들의 증언과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그 유래 및 의미를 정리한 것이다. 옛 시절 관아(현감)의 동쪽에는 현감의 사택이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한창일 때 김조근(金祖根) 현감이 도임했고 순조 33년(1833년)부터 헌종1년(1835년)까지 2년 남짓 재임했는데 그 현감의 따님이 아버지를 따라 와서 뒷바라지를 하고 살았다고 한다.
이 현감의 따님이 나중에 헌종의 왕비(효현왕후)가 된다. 이러한 연유로 보아서 현감의 따님을 왕띠기(왕댁 즉 우리지역에서는 부인의 택호를 모두 친정곳 지명에 ‘띠기’란 말을 붙이게 된다. 그래서 안동댁을 안동띠기, 진주댁을 진주띠기라고 부른다)로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세도를 부리는 안동김씨에 대한 민초들의 불만과 저항심리가 깔려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본인의 면전에서야 허리 굽혀 왕비라면서 극진히 공대했겠지만 돌아서면 “왕띠기가 됐단다” “왕의 마누라가 됐으니 또 얼마나 세도를 부리겠나”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왕비가 태어난 곳이라서 구룡산도 남산(南山)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인 바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상당한 연유와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댁(王宅)→왕띠기→왕띠 또는 왕뒤로 변음되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와서는 현청 있던 곳은 군 청사가 들어앉았고 현감의 관저는 주택지로 변했다. 왕뒤에는 오래된 고목 몇 그루가 남아있고 위쪽에는 충혼탑이 모셔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심었던 사꾸라 나무가 근래에 심은 벗나무가 많아서 이른 봄이면 사꾸라 꽃동산이라 해야 할 정도라서 조금은 불만스럽게 여기는 분들도 더러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