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칠곡 연결하천 방대
거대무덤 입석 유적 산재
고대 왕도의 구비조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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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곡면 신포리 입석. 이 지역 일대가 청동기시대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유적이다. | 의령지역에 고대국가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창녕군 영산면에서 발견된 왕도 유적에서 반대편 의령지역에 강력한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예측하게 되면서이다. 또한 의령지역을 방어하기 위해서 거대한 차단 늪지를 영산지역에 조성한 유적이 5곳이나 줄지어 있는 것이 발견됨으로써 얼마나 각축전이 심했던가를 늪지의 규모에서도 알 수 있었다. 영산 왕도의 유적은 가까운 의령은 물론 함안에 이르기까지 낙동강을 경계로 하였고, 특히 남강으로 통하는 수로를 더욱더 경계의 대상으로 의식한 방어 구조임이 밝혀진 것이다.
의령군의 지형을 살펴보면 남강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로서 방대한 구역과 길목을 장악하게 되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역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의령에서 왜군을 물리친 사건과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대첩 모두 남강에서 일어난 전란으로 얼마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 남강 줄기 인가를 알 수 있다.
남강을 장악하기 좋고 큰 세력권을 형성 할 수 있는 위치로서는 의령천 일대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남강의 상류에 위치하면서, 의령천과 연결된 지천은 칠곡천을 비롯한 내조천, 운암천, 가례천, 남산천, 용덕천, 용소천 등 방대한 면적을 감싸고 흐르는 하천이다. 또한 의령천으로 고대에는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던 하천이며 칠곡에는 입석군이 분포되어 있어 고대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고대 왕도가 될 수 있는 지역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곳으로 일반적인 성터와 큰 차이가 많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세력권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구비조건이 많으며 이러한 것이 충족이 되지 않으면 왕도가 될 수 없다.
가까운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가 한양으로 천도를 할 때 많은 대신들의 논의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처음에는 계룡산으로 천도를 하기 위해서 1년 가까이 공사를 단행하다가 중단하기도 하여 얼마나 어려움이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왕도가 발견되었다면 그 지역은 역사적인 많은 연구 자료와 함께 관련 유적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의령지역이 입지적으로 고대 왕도가 될 수 있는 적합한 곳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왕도는 일반적인 성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의령지역과 비교를 하면서 살펴보면, 도읍지는 갖추어야할 몇 가지 구성 요소가 마련되어 있어야 왕도라 할 수 있다.
첫째는 교통이며 고대국가는 하천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도읍지를 정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읍지는 교통이 편리해야 하며, 특히 지속적으로 생필품을 운반해야 하므로 하천을 이용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면 도읍지를 정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의령군 지역과 같은 산악지대는 강을 이용하지 않으면 물자 운반이 어려운 곳으로 하천을 이용한 교통에 의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본 연구회가 조사한 15개나 되는 모든 고대국가의 도읍지도 강과 가까운 곳에 도읍지가 발견되고 있는 공통점과 함께 모든 왕도 역시 동일하게 입증이 되고 있다. 가야연맹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낙동강으로 연결된 지역이기에 결속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세계 4대 문명지도 모두 강을 끼고 발달 하였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고대도시는 생필품의 지속적인 수급에서 수상교통이 용이한 지역이 아니면 도읍지를 정할 수 없게 된다.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생필품을 외부에서 운반해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곳으로 땔감과 식량은 지속적으로 수급이 되어야 만이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살펴보면 의령군 지역과 연결되는 강은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남강이 흐르고 있어 남강과 연결되는 수로를 조성하기에 좋은 곳을 주시하게 된다.
둘째, 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곳이 세력의 근거지로 가능성이 높다.
세력권이 형성된 곳에는 관련된 유적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거나 아니면 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곳이다. 큰 세력권이 형성되었던 곳은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과, 농경사회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을 선택하게 되면서, 인구밀집으로 인하여 세력권이 형성되기 쉬운 곳이 되고 있다.
의령관내의 남강과 가깝고 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곳으로는 의령읍을 중심으로 한 주변일대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셋째, 토착세력이 형성 되었던 기본적인 세력권의 근거지가 인근에 발견되고 있는가의 검토이다.
세력권이 형성 될 수 있는 토착의 기본적인 뿌리가 구성되어 있어야 만이 연계된 큰 세력권이 형성될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의령읍과 가까운 칠곡면에 입석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고대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되어 충분히 주변지역에 세력형성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위와 같이 밝혀진 세 가지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의령군에서 남강과 이어지는 지류에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의 규모와 밀집도가 높고 토착 세력의 근거지를 종합해 보면 어느 정도 압축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조사해 보면, 청동기시대의 입석이 있는 칠곡면과 가야시대 거대한 무덤이 조성된 의령읍의 입지를 조사한 결과 의령읍이 왕도의 도시 구조로서 어느 정도 적합성이 있으므로 보다 세밀하게 조사를 하게 된 것이다.
넷째, 왕도는 단일성이 아닌 복합적인 구조이다.
왕도는 일반적인 성곽의 구조와 다르며 거대한 도성을 조성한 만큼 수많은 격실 단위의 보호시설이 밀집되어 있어야 한다. 왕도와 왕궁을 찾아내기 어려운 것은 일반적인 성과 달리 후대에는 모두 논밭이나 집터로 변화되어 있는 만큼 찾아내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산성과 달리 도성의 구조로서 경작과 집터로서 지형의 변화가 많고 특히 의령읍 일대는 지속적으로 거점이 되면서 역사가 중첩이 되어 그 앞에 대한 것은 묻혀버리게 되는 지형 구조이다.
오랫동안 고대 왕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하지 않고는 판독에 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자료를 검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만 하여도 많이 압축이 된 것으로 인근 세력권의 위치와 지형, 관련 유적 등이며, 대부분 열 가지 이상 세밀하게 조사 연구를 하게 되면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실마리를 찾게 되면 해당 지역에 남아 있는 모든 자료를 수집하면서 보다 세밀하게 연구 조사를 하는 과정이다.
왕궁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그 당시의 정신적인 사상이 포함되어 있어야 만이 왕궁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되고 있는 왕도의 내면적인 학문이 되고 있다.
칠곡면 신포리 입석(이 지역 일대가 청동기시대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유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