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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의 인물들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577호입력 : 2021년 10월 14일
구학회 (의령읍)
 
 ⓒ 의령신문
 
  오늘날 우리들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과 글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1443년)하여, 반포(1446)하기 전까지 우리말은 있었지만 우리 글자는 없었다. 그러나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이후에 후손들은 한글을 하찮은 문자 정도로 무시했고, 연구와 재정립에도 소홀했다.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나고 일제에 의해서 국권이 피탈되고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말과 글을 학교 수업에서도 사실상 폐지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수업시간에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일제강점기의 시퍼런 총칼 앞에서도 당시의 조선어학회는 우리말 사전편찬작업을 꿋꿋하게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의령군청 네거리를 중심으로 의병천 닿는 곳까지 조선어학회 33인의 인물들이 현수막(배너)에 걸려 나부끼고 있다. 조선어학회 33인의 인물 중에 의령출신이 세분이나 계신다. 고루 이극로, 한뫼 안호상, 남저 이우식 선생이시다.

 조선어학회사건이란? 1942년 10월 1일 일제는, 일본어 사용 정책으로 조선민족을 영구히 말살하려는 것에 맞서, 언어독립운동을 전개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민족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당시 가장 수위가 높은 치안유지법에 내란죄로 적용해서 전국 33인의 회원들을 긴급 체포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조선어학회33인 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며 이윤재와 한징은 형무소에서 순국하게 되고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등 핵심 인사들은 해방이 되고나서야 형무소에서 풀려나게 된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언어독립운동으로 한글사전을 만들기 위해 ‘한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제정’, ‘외래어표기법 통일안’ 등 민족어 규범수립 운동을 전개하며 우리의 한글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무려 13년에 걸쳐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어학회사건을 겪은 후 해방이 되고나서 1947년에 ‘조선어 큰말사전’ 1권을 간행하였고 1957년에는 총6권의 ‘큰사전’을 펴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주시경 선생의 ‘말모이’ 사전편찬 작업을 시작한지 46년 만에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조선어사전편찬’을 마무리하게 된다.

조선어학회 33인중에는 3분이 우리 고장 의령출신이다.

고루 이극로 박사는 지정면 두곡리 출신으로 영화 ‘말모이’의 실제 주인공이기도하다. 조선어학회 책임자로 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며 회원 중 가장 무거운 징역6년형을 판결 받지만 “내가 조선땅에 들어선 날로부터 한글운동에 심력을 바치게 되므로... 이것도 천운인가 하노라”하였고 고통스러운 하루하루가 이어졌지만 모든 걸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해방 후 1948년 김구 선생이 주도하던 남북협상위원으로 평양에 갔다가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김두봉의 부탁으로 북에 남아서 북한의 한글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훗날 비록 남과 북이 분단되었지만 이극로 박사가 이끈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 덕에 말과 글의 남북분단은 없었던 것이다. 고루 이극로 박사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 외쳤고,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한뫼 안호상 박사는 부림면 입산리 출신으로 조선어사전편찬에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윤리학과 철학, 심리학 분야의 실무책임을 맡아 “조선어사전”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셨다.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였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받들어서 교육법에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을 법제화 하였던 분이시다.

 마지막으로 남저 이우식 선생은 의령읍 동동리(현 천주교 의령성당 )에서 만석지기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조선어학회에 실질적인 재정적 후원을 크게 하셨던 분이다. 일제강점기의 그의 재산은 실로 백성과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가난한 소작농에겐 소작료를 탕감해 주었고, 흉년에는 농민의 구휼에 앞장섰다. 고루 이극로 박사 등 인재양성에는 적극적인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상하이 임시정부에는 독립자금을 전하였다. 당시 백산 안희제 선생을 통해 해마다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달한 돈이 10만원 정도였을 거라 하였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이우식 선생은 항일투사였고 민족주의자였으며 애국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따스하고 인자하셨던 분이다. 농민 구휼에 앞장섰기에 은혜 입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십시일반하여 송덕비 12곳이나 세워 은혜에 고마움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4곳만 남아 있다고 한다. 1966년 이우식 선생의 사후에 비문을 쓴 노산 이은상 선생은 “세상에 부유하고서 교만하지 아니하기 어렵고 그보다도 귀중한 재산을 큰일과 좋은 일에 빛나게 쓰기란 더 어려운 일인데 그는 두 가지 어려움을 모두 행한 이라 우리는 그를 어진 이로 받들어 왔었다”라고 적고 있으며 1967년 7월 5일 한글학회 회원의 성금으로 세워진 의령읍 서동리 우수골에 이우식 선생 묘비에는 “일생에 어진 뜻을 품고 어진 일을 하고 가신 어진 어른 한 분이 여기에 누워 계시니 남저 이우식 선생이시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어학회33인의 인물들은 한글운동에 일제강점기의 수많은 억압 속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고 멈추지도 않았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민족애가 그분들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목숨 걸고 절벽을 오르는 심정으로 한글 지키기에, 한글 가꾸기에 앞장섰던 분들이다. 우리 후세들은 지금 당장 현실적인 어려움과 부족함 때문에 하고자 하는 뜻을 포기해버린다면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는 국립국어사전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분들께 한글사랑에 깃든 따스함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바다.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577호입력 : 2021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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