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읍 만천리 노재성 님 부인
강윤희 여사 <열녀><효부> 행실
문학박사 허만길(전 문교부 편수관)
▲ 의령군의 인물록 계속적 관리를 바라며
우리나라는 1910년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효자, 충신, 열녀에 대해 국가에서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받도록 하는 데 매우 힘썼다. 효자, 충신, 열녀가 살던 마을 입구 또는 살던 집 앞에는 붉은 문(정문. 작설. 홍문. 홍살문)을 세우기도 하고,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 주기도 하고, 벼슬을 주기도 하고, 상품을 주기도 했다. 종친회를 비롯한 사회단체, 후손, 친지들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광복 후에는 국가 유공자의 경우는 다르다 할지라도 효자, 열녀에 대해서는 지방자치단체에 따라 그 관심과 인물록 관리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인물을 중시하는 의령군에서는 앞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는 물론 미래 세대에 이르도록 의령에서 태어났거나 의령에서 살았던 사람 가운데 애국, 정치, 문화, 교육, 경제, 사회, 효도, 열녀 등 영역별로 두드러진 인물을 공개적으로 찾아, 그 인물의 삶과 공적과 행실을 계속적으로 입력해 가는 장치를 마련함이 좋겠다. 그 인물록을 의령군 인터넷 홈페이지나 의령문화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업데이트(최신 정보화) 형식으로 개방해 두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예산도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 아울러 이미 발간된 ‘의령군지’의 일제 강점기 이전의 인물편을 비롯해 여러 영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오류와 모자람을 공개적으로 바로잡는 노력을 기울이기 바란다. 국가 공공기관에서 발간하는 책은 정확성이 중요하다. 국내의 지방자치단체에 따라서는 군지(郡誌)를 발간할 때 그 초안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하여 군민이나 향우들의 의견을 미리 듣기도 하고, 군지를 종이책만 아니라 값싼 CD판으로도 제작하여 널리 보급하고 있음도 참고하기 바란다.
▲ 노재성 님 부인 강윤희 여사 <열녀><효부> 행실
나는 여기에 일제의 대한민국 강점기와 대한민국 광복 후를 의령군 의령읍 만천리에서 살아온 열녀(烈女)이자 효부(孝婦. 시부모를 잘 섬긴 며느리)인 강윤희(姜潤熙) 여사의 행실을 소개하며 기리고자 한다.
강윤희(姜潤熙) 여사는 본관이 진양(晋陽. 진주. 진산)이며, 1898년 8월 21일 아버지 강요형(姜堯馨) 님과 어머니 윤임야(尹任野) 님의 장녀로 의령군 용덕면 신촌리에서 태어났다. 18살 되던 1915년 의령군 의령읍 만천리(萬川里. 마내) 만상(萬上)마을 노재성(盧在聲) 님과 혼인하였다. 노재성 님은 본관이 광주(光州)이며, 1900년 5월 2일 의령읍 만천리 788번지에서 태어나 자랐다.
만천리 만상마을은 원래 마내 상촌(上村)부락, 마내 웃말(윗마을). 마내 노촌(盧村)으로 불리던 곳이다. 대한민국 광복 이전에 이곳에서 시집간 여인들의 택호는 상촌댁, 마내댁, 노촌댁으로 불리었다. 조선 중기에 부호군(副護軍. 종4품)을 지낸 노인복(盧仁復. 호 구암龜庵)이 임진왜란 직후 현재의 만천리 만상마을에 들어와 살았는데, 이 사람이 광주 노씨(盧氏)의 의령 입향조(入鄕祖. 지역에 처음 들어온 조상)이며, 광주 노씨 구암공파(龜庵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그래서 만상마을은 예로부터 노촌(盧村)이라 불리었으며, 이 마을에는 구암(龜庵) 노인복(盧仁復)의 재실(齋室. 제사 지내는 집) 구양재(龜陽齋)가 있다.
강윤희(姜潤熙) 여사의 남편 노재성 님은 아버지 노형용(盧馨容. 호적이름 노준용盧準容. 족보이름 노형용盧馨容. 호 화헌華軒. 1882. 5. 3.-1958. 3. 15.) 님과 어머니 전덕양(田德陽. 1879-1916. 본관 담양潭陽) 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형용 님은 인품이 온화하고 고상하고 덕행이 뛰어났으며, 이름난 유학자이었다. 노재성 님의 조부 응초(鷹樵) 노정훈(盧正勳. 1853. 9. 15.-1929. 8. 2.) 님은 나이 50대에 의령향교(宜寧鄕校) 전교(典校. 향교의 책임자)를 지내고, 의령군 향장(좌수. *지방 수령의 자문기관 유향소의 우두머리)도 지냈는데, ‘의령군지’ 인물편 유행(儒行 *유학에 뛰어난 행위)에 이름이 올려 있다. 노정훈 님은 13살에 부(賦)와 시(詩)에 능하였고, 선(善)을 즐기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다. 1901년(광무 5)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님을 추모하기 위해 이의정(二宜亭)을 지을 때 중심 역할을 했고, 만상마을에 광주 노씨 구암공파 파조 구암(龜庵) 노인복(盧仁復) 님의 재실 구양재(龜陽齋)를 지었다. 유림사회에서는 그를 영남(嶺南)의 명망 높은 도유(道儒. 경상도의 대표적 유학자)라고 했다. 그의 장례는 유림회장(儒林會葬)으로 치러졌다. 구양재 옆에 그를 기념하는 응산정(應山亭)이 있고, 응산정 앞에 그의 제단비가 있는데, 경상남도에서 세운 도비(道碑)이다. 저술로 ‘응초선생문집’(鷹樵先生文集)과 ‘응초유집’(鷹樵遺集)이 있다. 노재성 님의 증조부는 유학자 노응규(盧應圭. 1831-1880. 6. 30.) 님이며, 고조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의령군지’ 인물편 수직(壽職)에 올려 있는 노세백(盧世伯. 1791-1879. 4. 9.) 님이다. 강윤희 여사는 통정대부 부호군 노세백 님과 영남의 대표적 큰유학자 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