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壽山 李泰植 선생
위패봉안 釋菜禮, 臨川亭에서 거행
독립유공자이자 유학자인 수산(壽山) 이태식(李泰植:1875.4.10~1951.11.23) 선생의 위패봉안 및 석채례(釋菜禮)가 지난 6월 21일 오전 10시 선생의 강학거소였던 정곡면 오방리 소재의 임천정(臨川亭)에서 지역유림(이병도, 한기인, 이종윤 외 유림)들의 주관으로 거행되었다.
수산 선생은 2004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이에 따라 수산 선생의 묘소에 있는 추모비는 국가보훈처의 현충시설(2008.11.25)로, 임천정은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485호(2009.11.19)로 각각 지정되었다. 이 같은 추서와 지정을 받기까지에는 수산 선생 묘소와 임천정의 관리자이자 선생의 손자인 이종경 전 의령문화원 원장의 공로가 컸다.
이날 행사는 헌관(獻官) 김창효(진주.전 경상대 교수), 집례(執禮) 조문규(함안), 축(祝) 이명성(창원.경상대 교수) 유림이 각각 맡아 진행되었다.
허권수(許捲洙)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번 행사를 위해 지은 ‘수산선생봉안문’(壽山先生奉安文)에서 “(전략)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보통사람과 달리, 총명하고 빼어나고 영민했습니다. 부지런히 분발하여 글을 읽어, 밤낮으로 쉬지 않았습니다. 조금 자라서는 바른 가르침 얻고자 하여, 다전의 면우 선생 문하에 나아갔습니다. (중략) 학문이 이루어지고 덕행이 닦여져, 경상우도의 큰 학자가 되었습니다.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의 학맥을 잘 계승했습니다. 사우들이 추앙하고 존중하니 원근에서 배우러 왔습니다. (중략) 향사에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했나니 지금까지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향사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넓은 지역에 퍼져나갔습니다. 이에 도회를 개최하였나니 누가 그 일을 찬성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좋은 날을 받아 경건하게 술과 제수를 갖추었습니다.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앙합니다. 위패를 써서 봉안하여 의식을 갖추어 이루었습니다. 영령께서는 강림하시어 보잘 것 없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서 후학들은 어리석고 몽매하오니 나아갈 방향을 흡족히 은혜롭게 내려주옵소서”고 고하였다.
이종경 전 원장은 “이번 행사는 원래 음력 4월에 열 계획이었는데 임천정의 보수공사가 다소 지연됨에 따라 오늘에서야 갖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매년 봄에 임천정에서 수산 선생(조부)께 석채례를 올리게 될 것입니다.”며 “메르스 예방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초청장을 내지 않았는데도 김채용 전 의령군수, 지역 유림계 및 문화원 인사를 비롯한 종친 등 150여명이 참석해 행사를 빛내주신데 깊은 감사드립니다.”고 말했다.
‘수산이선생관계문록’(발행처:臨川亭悅樂契.발행인:이종경,2009.10)에 소개된 자료에 의거, 수산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 임천정, 가계 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수산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
수산 선생의 독립운동에 관한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에 의하면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한국 유림 대표 137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이어 만주 내몽고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세력 양성을 위해 영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약 600여명에 달하는 많은 유림을 체포 구금하였던 이른바 2차 유림단 사건에도 관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삭녕(朔寧) 최인찬(崔寅巑)은 ‘수산선생이공 추모비명’(한문)에서 “(전략) 파리장서사건을 당하여 영남 호서의 참자가 가장 많았는데 의령에서는 삼현(三賢)이 연서하였는데 수산 선생이 그 한 분이다. (중략) 제2 유림단 사건으로 공이 이르기를 ‘내 비록 힘이 적어 적을 멸하지 못하나 그러나 어찌 차마 머리를 숙이고 포로가 되겠는가?’하고 곧 바람처럼 금강산 중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되 자나 깨나 민족정신을 들춰 일이 나라에 관계되면 수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 먼저 앞장섰다. 그런데도 수년 세월동안 적에게 체포되지 않았으니 기적이라 이르겠다. 또한 당시 왜경의 노기에 가족은 동서남북으로 이산되고 선생의 종질 홍기와 문인 강인중이 공가를 돌보는데 힘입었으니 그 참상을 무엇이라 말 할 수 있겠는가!”라고 기록했다.
임천정(臨川亭)
수산 선생은 직접 쓴 ‘임천정기’(臨川亭記)에서 “나는 타고난 재질이 소략하고 어리석으나 처음부터 자못 성현의 학문에 뜻을 가졌고 늦게는 세태의 변란을 만나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수염과 모발이 이미 희끗희끗해졌다. 지난 변란을 되돌아보니 놀란 물결이 조금 조용하여 옛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먹으나 심히 무료하였다. 종가의 당질 홍기가 여러 사람의 성성을 모아서 이 집을 수골산 남쪽 기슭에다 세웠는데 마루는 삼간이고, 거처할 곳으로는 양섶으로 방이 네 칸이니 동서로 대치하였다. 또 마루는 앞에 있어서 날개를 편듯하니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함이 매우 알맞았다. 동쪽 행랑을 망추헌(望楸軒)이라 한 것은 조부의 산소를 바라봄에 감모가 있어서이고, 서쪽 행랑을 관문실(觀文室)이라 한 것은 주역의 비괘 단사에서 뜻을 취하였으니 천문과 인문을 관찰함에 있다. 모두를 이름하여 임천정(臨川亭)이라 하였다. 지금 눈앞에 구우(九宇)가 기울어져 큰물이 넘쳐흐르듯 하여 우리의 도가 기울어짐이 위태롭기가 한 가닥 털끝 같으니 장차 고요하고 외진 이곳에서 물소리와 산색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산마루에 걸린 달과 시내위에 뜬 구름이 경치를 돋움으로써 문사(文思)가 창달되고 자가에서 심신이 휴양되어 이 사이에서 너그러움을 얻고자 하였다.”고 밝혔다.
임천정 정문 앞에 세워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5호 지정 안내문에는 “임천정은 독립운동가이며 유학자인 수산 이태식 선생의 처소 겸 서당으로, 1928년경에 그의 제자와 사림이 본래 있던 행양서숙(杏陽書塾)을 개축한 것이다. 정면5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1칸씩의 온돌방이 있고, 그 앞에 각 마루가 1칸씩 있는 ‘ㄷ’자 형태의 구조이다. 단순하면서도 평범해 보이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31년 의령지역의 역사지리서인 의춘지(宜春誌)를 편찬한 곳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임천정계안’(臨川亭契案)에는 ‘열락계절목’(悅樂契節目) 여섯 가지가 있다. 그 첫째, 열락(悅樂)을 계명으로 한 것은 논어 첫장(首章)에 해당하는 학이편에 나오는 공자의 ‘군자삼락’의 의를 준수하기 위함. 둘째, 앞서 말한 군자삼락의 정의를 우러러보는 원근의 동지를 모아서 현우로 삼음. 셋째, 계의 일자는 매년 음력 11월 10일로 정함. 넷째, 다소 각자의 세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금전과 명예는 불허함. 다섯째, 곗날에는 문망행덕자의 강론을 청해 들음. 여섯째, 계원 중 사교에 빠져 공맹의 성교(聖敎)를 손상시키는 자는 스스로 계원들의 논의에 따름 등이다. 따라서 임천정열락계는 수산 선생의 문하생들로서 이 같은 ‘6절목’(6節目)으로 공자의 ‘군자삼락’을 지향하는 수신(修身)자들의 모임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수산 선생의 世系
문소(聞韶) 김황(金榥)은 ‘수산 이선생 묘갈명’에서 “공의 휘(諱)는 태식(泰植), 자(字)는 자강(子剛), 수산(壽山)은 별호이다. 그의 조상은 철성가(鐵城家:철성은 경남 고성의 옛 지명)요, 중세에 의령으로 이사해서 유망한 씨족이 되었다. 시조는 철령군(鐵嶺君) 황(璜)이며, 군자감 판관을 지낸 백암(栢菴) 지(旨)와 괴당(槐堂) 만승(曼勝)은 대대로 충효와 대절이 있었으니 그의 11대, 10대조이다. 증조부는 관민(觀敏), 조부는 운낙(雲洛), 부친은 상모(尙模)이며 모친은 담양전씨 형목(馨霂)의 딸이다.”고 기록했다.
또한 “수산 선생의 부인은 진씨(陳氏)인데 여양(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5년 0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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