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기념 특별기고】
허찬도(許贊道)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과 선각적 계몽활동
문학박사 허만길(전 문교부 편수관)
(사진은 허찬도 선생)
허찬도(許贊道)는 처음이름은 허기룡(許己龍), 자는 달홍(達洪), 호는 정암(貞庵)이다. 조선 전기 1480년경 경남 고성에서 의령으로 이주한 유학자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퇴계 이황 처조부)의 후손이다. 1909년 양력 6월 17일 선비 허종성(許宗成·1891-1951년)의 차남으로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25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최성경(崔成景·1889-1964년)이다. 그의 부인은 의령군 의령읍 만천리 상촌부락에서 태어나 자란 노갑선(盧甲先·1908-1998년)인데, 의령군 향장(좌수. *지방 수령의 자문기관 유향소의 우두머리)을 지내고 ‘의령군지’ 인물편 유행(儒行 *유학에 뛰어난 행위)에 올려 있는 노정훈(盧正勳·1853-1929년)의 맏손녀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의령군지’ 인물편 수직(壽職)에 올려 있는 노세백(盧世伯·1791-1879년)의 고손녀(현손녀)이다. 허찬도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애국 독립 운동을 한 항일애국지사이며, 선각적 사회 계몽 활동가이다. 대한민국 광복 후에는 김해 허씨 허원보(許元輔) 예촌공파(禮村公派) 및 허수(許琇) 참봉공파(參奉公派) 종친회 임원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평생 가난한 가운데서도 청렴하고 검소하고 곧고 바르고 의롭게 살았다.
▲10살 때 3·1독립운동 참가
허찬도는 1919년 10살 때 경남 의령군 칠곡면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그의 아버지 허종성(許宗成)은 주재소(일제 때 경찰기관)로 끌려가 경찰서에 구속되고, 그는 경찰에 쫓김을 당하였다.
허찬도는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을 뼈아프게 생각하였으며, 백성들이 무지하고 가난하고 일제에 온갖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서 황당하게 살아가는 것에 의분을 지녔으며, 봉건과 권위에 도전하면서 자랐다. 스무 살(1929년)에 세상 구경을 위해 노동을 하면서 부산으로 가출했다가 칠곡면에서 가장 먼저 상투머리를 깎은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세상 구경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만 나라를 되찾는 일을 비롯해 진취적인 일을 할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칠곡소학교 야학과정 설치 건의
허찬도는 칠곡소학교 교장을 찾아가 소학교에 야학(밤공부) 과정 설치를 건의했다. 36명의 희망자를 모아 1930년(21살) 양력 12월 하순부터 야학 공부를 시작하여, 1933년(24살) 양력 6월 하순까지 약 2년 6개월간의 야학 과정을 수료한 자는 15명이었다. 교과서는 신명균 지은 ‘노동독본’(조선교육협회 발행) 3권이 중심이 되었다. 칠곡소학교의 야학과정은 의령군에서는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이며, 당시의 교육 내용, 교과서, 권학가 등은 우리나라 교육사에 기록될 가치가 충분하다. 그때 칠곡소학교 교장은 일본인이었으며, 조선인 젊은 교사로서 머리에 새치가 희끗희끗 섞여 있는 교사가 설(薛) 선생이고, 키가 작은 교사가 우(禹) 선생이었다.
▲칠곡면 소방조 입조
허찬도는 야학을 수료한 그해 1933년(24살) 초가을 칠곡면 소방조(消防組 *소방 활동 조직)에 가입하여 불손수레를 끌며 화재 예방과 불끄기에 힘썼다. 소방조의 우두머리는 ‘소방조두’(消防組頭)라 했으며, 소방조두는 일본인으로서 금테 두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마 뒤 허찬도는 책임감과 성실함을 크게 인정받아, 평조원의 반장인 ‘소방소두’(消防小頭)가 되었다.
▲집현면 주재소 구로다 부장 가격 2개월 옥고
1936년(27살)에는 경남 진양군의 집현면과 도동면의 공동 관할에 속하는 장재못에 양수기(물을 끌어올리는 기계)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가뭄 걱정을 덜어 주고자 했다. 진주 일대에서 가장 드러난 갑부이고 논밭을 가장 많이 가진 서상필, 정상진 등을 만났다. 1929년 기사년(己巳年)에 지독한 가뭄이 들었을 때 농사짓기에 아무 대책이 없다가 많은 사람들이 굶어야 했던 일을 상기시켰다. 두 갑부뿐만 아니라, 많은 농민들도 적극 찬동하였다. 진주경찰서의 승인도 받았다. 그해 4월 공사가 거의 완료되어,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시운전 단계에 갔을 때, 집현면 주재소의 일본인 구로다(黑田) 부장의 끈질긴 방해가 시작되었다. 구로다는 주재소 안에서 허찬도에게 폭력을 가하며 조선인(朝鮮人)이라며 멸시했다. 허찬도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구로다 부장을 가격하여 진주구치소에서 두 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일본 무기 공장 아사히철공소 동맹파업
진주구치소 생활은 그에게 나라 독립의 절실성을 더욱 강하게 품게 했다. 1940년 5월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사카이시(堺市) 미미하라쵸(耳原町)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과 함께 2층 가옥에서 살면서, 근처의 군수물 공장(무기 생산 공장) ‘아사히철공소’(朝日鐵工所)에서 ‘고야마’(湖山)로 불리며 일했다. ‘아사히철공소 조선인화친회’(朝日鐵工所朝鮮人和親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고, 1940년 한겨울 동맹 파업을 벌여 군수물 공장의 가동을 멈추게 하였다. 허찬도는 감히 일본 땅에서 무기 공장 가동을 공공연히 멈추게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인이 동맹으로 아사히 군수 공장의 불을 끄다. 주모(主謀)는 조선인 화친회 회장 고야마(湖山)”의 제목으로 일본 신문에 기사화되었다. 허찬도는 밤중에 숙소에서 7명의 사복형사들에게 체포되어, 경찰서로 호송되는 도중 끝까지 남은 2명의 형사들과 격투 끝에 탈출하였다.
허찬도는 한다야마(半田山)에서 이틀간 머문 뒤 야하타(八幡)로 가서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 조선인친화회(朝鮮人親和會)’ 임원들과 은밀히 만나면서 경찰이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1941년 2월(음력 1월) 아내와 8살 된 딸(허맹준許孟俊)을 한국의 고향에서 일본으로 이주시켰다. 가족들은 일본의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오아자(大字) 전차 정류소 부근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석 달 만(1941년 5월경)에 교토부(京都府) 구세군(久世郡) 오쿠보무라(大久保村) 오아자(大字) 오쿠보나이(大久保內) 30번지 셋방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약 2년 뒤 1943년 3월 아들 허만길(許萬吉)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강제 징병, 일본 사가켄 훈련소 생활
허찬도는 매제 하만행(河萬幸)과 일본 교토부 오쿠보 비행장에서 노무자 일을 하던 중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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