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의 등불이 되어
무애 박재호
나들이를 하고 집에 온 등불은 아주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와∼ 집에 오면서 혼이 났어요. 비 오는 날의 운전은 안 그래도 시야가 불편한데 며칠 전부터 양쪽 눈에 주렴 같은 게 스멀스멀 내려오고 있던 것이 오늘은 더 심해졌어요.”라고 하면서 곁에 있는 내가 들어도 좋고 말아도 좋다는 식의 독백을 하였던 것이 비 내리는 2008년 어느 봄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평소 등불의 베개 머리 송사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애써 묵묵부답, 무신경,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나의 모습에 안달하면서 잡생각 병(우울증?)을 자주 앓아대는 등불과 부부의 연으로 살아 온 세월이 사십 수년. 잠결에 듣는 기침소리만으로도 감기인지 독감인지 단박에 분별할 수 있지만 때로는 심경을 불편하게 하는 상당한 충격(?)을 가해와도 그저 들은 듯 못 들은 듯, 있는 듯 없는 듯 그런 옆 지기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딱 하나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일 중에 하나는 등불이 몸이 아픈 것을 혼자 참아내려고 끙끙거리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안 보는 척 딴청을 피우면서 사실은 다 보는 주변시(周邊視)로 잘 지내되 똑 같지 않은 화이부동(和而不同)한 남편으로 살아온 내 심장에도 갑자기 불길이 붙습니다.
“이 사람 등불님, 그게 무슨 소리요? 눈에 무엇이 스멀거리면 당장 병원에 가 봐야지. 그래, 그러고도 이런 날 운전을 하면 어떻게 해! 나 보고 데리러 오라고 하든지, 대리운전을 해서 오든지 않고…. 내일 당장 안과에 가 봅시다. 그대로 두면 안 돼.”라고 일렀더니, 등불은 “그러다가 괜찮겠지 싶어서 그랬지요, 뭐….”라며 목소리가 기어들고 있었는데, 그 다음날 등불의 손을 잡고 찾아간 전문 안과병원 의사는 “백내장 증세가 조금 있으나 경미하여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수술을 하거나 약물치료를 해도 시력이 나아진다고 장담할 수 없는 황변변성이 동시에 온 것이 문제입니다.”라고 하면서 “황반변성은 사물이 찌그러져 보이거나 운전 중 갑자기 도로가 끊어져 보이기도 하는 눈병인데 우선 약물투여로 더 나빠지지 않도록 노력해 봅시다. 지금 왼쪽 눈은 거의 시력이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진단 결과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뿔싸! 의식의 깊이는 근기에 따라 각기 다르고 업보의 무게는 천인만색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의 모습이건만 내 상흔(傷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수십 년을 가녀린 등불이 일촌간장의 심사로 살게 하였으니 이제 시력까지 가는구나!!! 나무아미타불. ()()().
참으로 기막히고 걱정스러운 일이 틀림없었으나 얕은 내 의학상식으로도 눈병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는 안도감이 있었지만 멀쩡하게 잘 보고 다니던 사람이 어느 날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일을 어찌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앞날의 막막함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왔습니다.
그로부터 7여 년 동안 등불은 시력회복에 좋다는 온갖 자연식품을 골라 먹으면서 햇볕에 나서면 색안경을 써야하고 밤이면 지팡이가 된 나의 손을 잡지 않으면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문밖출입도 부자유스러운 고통을 안고 사는데, 약으로 치료할 수도 없고 수술로도 시력이 회복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하므로 눈에 좋은 자연식품으로 시력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은 찾을 수 없다니 그 난감함을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유별난 아미타파 카페 사랑으로 컴퓨터에 ‘나무아미타불’ 사경을 일삼는 등불의 즐거움마저도 눈 건강을 위해 자제하라는 잔소리를 해 대었습니다. “이보시오, 등불보살님! 건강해야 부처님도 섬기고 컴퓨터 염불사경도 하는 거요. 컴퓨터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면 당신의 눈에는 상당히 해로울 것 같으니 이제 좀 쉬엄쉬엄 하시게나.”라고 으르고 달래며 등불의 시력이 더 나빠지지 않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찾아 상당한 정성을 쏟아 부었지만 등불의 시력이 호전되기는커녕 나이가 나이니만치 노안까지 겹쳐 한낮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우리 집 층수 숫자판마저도 찾기 힘든 눈병이 짙어만 가고 있습니다. 황반변성은 현대의술로도 대처할 방법이 없는 참으로 희귀한 눈병입니다. 번뇌가 바로 보리(菩提)요, 생사가 바로 열반이라는 것이 살아가는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등불은 일거리가 없는 노년의 상실감과 시력소멸의 불안증이 겹쳐 진짜배기 우울증을 좀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시신경이 허약했던지, 유전적 소인 때문인지 전문 의사들도 발병원인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눈병으로 등불의 시력이 소멸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함께 노년을 맞는 옆 지기로서는 안타깝고 애달프기만 합니다.
노년의 부부는 지나온 세월의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서로 위로하고 보살펴 주는 따뜻한 마음과 측은지심으로 여생의 지팡이가 되어 서로를 지키다 가는 동반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법명이 등불인데도 다른 사람의 무명을 밝혀주지 못하는 일상시력 10% 등불의 등불이 되어 단풍여행을 나서야할 것 같습니다. 시력이 완전히 소멸되면 저 아름다운 단풍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을…….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