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嘉禮)면과 가례(加禮)마을 한자 다른 까닭도 밝혀
조선 전기 허원보의 의령군 가례 이주에 따른 지명 형성
- 가례면은 역사적 인물 향기와 지명 가치 위대한 땅 -
▲ 들어가는 말
고려 후기 충숙왕 때 1321년에 문하시중(영의정, 국무총리에 해당)을 지낸 허유전(許有全)의 손자 호은(湖隱) 허기(許麒)는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키자 고려 충신으로서 경상도 고성(철성)에서 절개를 지켰다. 그는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시를 주고받으며 한가롭게 지냈다. 허기의 증손자의 한 사람인 허원보(許元輔: 1455~1507년)가 혼인 후 새살림을 의령현 가례(嘉禮. 현재 의령군 가례면)에서 꾸렸는데, 허원보가 가례에 이주함으로써 그와 그의 후손과 인척은 조선의 15세기 전성기에는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16세기 말 임진왜란(1592〜1598년) 때는 구국의 역사적인 사명 활동을 다하였다. 나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의령신문’ 제298호(2012. 3. 23.), 제305호(2012. 7. 13.), 제310호(2012. 9. 28.)에서 소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나는 조선 시대는 혼인 시기가 빨랐다는 점과 허원보의 장남 허수(許琇)가 1478년에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여, 1480년 전후로 허원보가 의령현 가례로 이주하였으리라고 추정했다.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이 있어야 편리하듯이, 사람이 어떤 지역에서 살아가자면 당장 필요한 것이 그 지역의 여러 곳에 대한 이름을 지어야 대내외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편리하다. 그래서 나는 조선 전기 허원보의 가례 이주에 따라, 당시 의령현 가례 지역의 주요 지명이 어떻게 새로이 형성되고 어떻게 불리었으며, 오늘날 그 지명이나 지명의 위치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밝혀 보기로 한다.
▲ ‘가례’ 지명은 허원보 지음 신빙
나는 허씨(許氏) 조상들로부터 전해 오는 말이라며, 의령군의 ‘가례(嘉禮)’는 허원보가 지은 이름이며, 그의 호 예촌(禮村)은 ‘가례(嘉禮)’의 끝 글자를 따서 역시 그가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왔다. 그것은 실지로 족보 및 묘비문 등과 관련지어 볼 때 신빙성 있는 일이다. 허원보는 새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그 지역을 부를 이름이 절실하고, 그곳을 어떻게 가꾸어야 할 것인가 하는 포부가 있었을 것이므로, ‘예를 아름답게 밝힌다’는 뜻을 지닌 ‘가례(嘉禮)’로 이름하고, 자신의 호를 이와 관련하여 ‘예촌(禮村)’이라 했을 것이다. ‘가례’의 지명을 허원보의 손녀의 남편 퇴계 이황(1501〜1570년)이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 추측은 가능성 없는 일임을 나는 ‘의령신문’ 제298호(2012. 3. 23.)에서 지적한 바 있다. 참고로 퇴계가 허원보의 손녀와 혼인한 때는 1521년으로서 허원보가 가례로 이주한 지 약 40년 뒤이며, 허원보가 죽은 지 14년 뒤이다.
▲ ‘백암’ 정자 이름은 허원보 지음
‘김해 허씨 세보’ 권1(3〜4쪽. 1936)의 ‘허원보’(許元輔) 항목에는 “고성에서 의령으로 이거하여 가례 백암(흰바위)과 산수를 사랑하여 정자를 지어 놓고 ‘백암’(白巖)이라 했다.”(自固城移居宜寧愛嘉禮白巖山水規置一亭曰白巖)고 했다. 또 조선 후기 의금부도사 척암(拓菴) 김도화(金都和: 1825∼1912년)가 쓴 허원보의 묘비문(의령읍 무전리)에는 가승(家乘: 직계 조상의 일을 기록한 책)을 살피어 썼다며, “예촌 허원보는 일찍이 ‘가례’(嘉禮)의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작은 집을 지어놓고 ‘白巖’(백암)이라 현판을 걸었다.”(嘗酷愛嘉禮山水規置小屋而扁之曰白巖)고 했다. 세보에 허원보는 이 백암정에서 유명한 학자와 벼슬아치들과 곡수상(曲水觴)을 하였으며, 뒷날 퇴계 이황이 이 백암정에서 놀며, 앞서 허원보와 함께 여럿이 술을 마시며 읊었던 시의 운을 따서(차운次韻) 지은 시가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곡수상(曲水觴)은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뜻하는 말로서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며 시를 짓던 놀이를 말한다. 퇴계 이황도 그의 처조부 허원보처럼 백암정 앞의 유상곡수 터에서 장모와 아내가 술잔을 띄워 보내면 그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허원보가 나무로 건축한 백암정(白巖亭)은 세월과 비바람으로 새로 짓기를 거듭했고, 근래에는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말미암아 파손되었는데, 이 유서 깊은 정자가 어서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백암정 앞 내(川) 이름은 ‘박천’(駁川)
‘김해 허씨 세보’ 권1(3〜4쪽. 1936)의 ‘허원보’ 항목에는 백암정에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우랑(佑郞) 김영(金瑛)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며,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移床坐坡面 冷氣透衣裳”(언덕 위에 평상 옮겨 놓아 앉으니, 옷 속에 찬 기운 파고드는구나.)로 시작하는 한시(漢詩)는 제목이 없으며, 백암정 바로 근처의 백석(白石. 흰바위 ‘백암’을 가리킴)과 석양을 배경으로 물가에 모여 술과 붕어회를 즐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한시가 당시에 함께 즐겼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문집 ‘탁영 선생 문집’(濯纓先生文集) ‘권6 시’(卷六 詩)에 ‘宜寧駁川與許上舍元輔同遊’(의령 박천에서 허진사 원보와 함께 놀며)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시와 일치함을 확인했다. 한문학계에서는 지금껏 이 한시가 김일손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탁영 선생 문집’의 제목을 보면 ‘박천’(駁川)이라는 내(川) 이름이 나온다. 이 ‘박천’이 백암정 앞의 내(川)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은 그 내 이름이 전혀 전해 오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백암정 앞의 내를 ‘박천’(駁川)이라 불렀던 것이다.
참고로 탁영 김일손(1464년, 세조 10년∼1498년, 연산군 4년)은 1486년(성종 17)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고, 홍문관 교리, 사간원 헌납, 이조 정랑 등을 지내고 무오사화 때 사형당했으며, 중종반정으로 관직이 회복된 당시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다.
▲ 허원보 살던 마을이름 ‘백암촌’(白巖村)
허원보가 처음 ‘가례’(嘉禮)라고 한 지역은 현재의 가례면 지역 범위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 마을 정도의 범위일까 하는 의문을 남기게 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년)은 1533년(계사년癸巳年. 만 32살) 음력 1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 두 달 남짓 남도여행(남도유람)을 하였다. 여행지는 처가가 있는 의령현이 중심이 되지만, 합천, 마산, 창원, 함안, 진주, 곤양 등 여러 지역을 포함했다. 그때는 1527년 11월 허씨 부인이 죽은 지 5년 뒤이고, 1530년 둘째부인 권씨를 맞이한 뒤이고, 1534년 문과 급제 하기 직전의 해였다. 당시 퇴계의 처가 마을에는 매화가 많았다. 퇴계는 남도여행 때 처가에서 40구로 된 매화 시를 썼다. 이 매화 시는 세상에 알려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 매화 시를 보면 그 시작이 “宜城別占好乾坤 白巖村裏多林園”(의령에 좋은 세상이 따로 있으니, 백암촌 안에 숲 정원이 많다네.”로 되어 있다.
나는 퇴계의 이 매화 시를 통해 허원보가 살던 그때의 마을 이름은 ‘백암촌’(白巖村)이었다고 밝히는 바이다. 허원보는 논밭과 산과 재물과 딸린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허원보가 살던 곳은 한 마을을 충분히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허원보가 정자 이름을 ‘백암’(백암정)이라 했듯이 자신이 살던 마을 이름을 ‘백암촌’이라 했던 것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허원보가 살던 마을이 ‘백암촌’이었다는 것은 허원보가 지었다고 하는 ‘가례’(嘉禮)가 자연히 백암촌보다 넓은 범위인 현재의 가례면 지역과 거의 일치했을 것이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이 백암촌을 시작점으로 의령현 가례는 예촌 허원보는 물론, 그와 친교를 맺은 그 시대의 역사적 유명 인물들, 중앙과 지방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한 그의 여섯 아들, 선전(宣傳)을 지낸 그의 맏사위 박양(朴良), 그의 둘째사위인 무과 급제 박운(朴芸) 충청병마절도사, 그의 손자들로서 중훈대부(종3품) 예빈시(禮賓寺) 참봉 허안세(許安世), 군자감정(軍資監正.정3품) 허안정(許安鼎), 진주 목사 허윤렴(許允廉), 그의 손녀의 남편 퇴계 이황(李滉),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후처가 되어 곽재우를 세 살 적부터 길러 의병장으로 만들고 의병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褀)를 낳은 그의 손녀, 그의 증손자로서 무과에 급제하고 곽재우 장군의 매부가 되어 의병 군량과 자금을 뒷받침하며 번개처럼 싸운 허언심(許彦深) 의병 장령, 문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내내 큰 공을 세워 권율(權慄) 장군의 추천으로 통정대부(정3품)에 오른 오운(吳澐) 장군의 부인인 그의 증손녀, 경북 영주에서 고향 사람들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어 큰 전공을 세우고 의금부도사를 지낸 박녹(朴漉)의 부인인 그의 증손녀 등과 인연 깊은 위대한 역사의 땅이다.
▲ 백암촌과 수성과 가례동천의 위치
허원보의 둘째딸의 남편 박운(朴芸)은 무과에 급제하고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 종2품)를 지냈는데, 퇴계의 처고모부가 된다. 그는 삼가현 송지촌(현재 합천군 대병면)에서 살다가 처가가 있는 의령현 가례로 와서 살면서 퇴계와 가까이 지냈다. 박운(朴芸)이 허원보의 둘째사위였음은 ‘김해 허씨 세보’에도 나타나 있다. ‘밀성 박씨 졸당공파보’(密城朴氏拙堂公派譜) 권1(38쪽. 1990)의 ‘박운’(朴芸) 항목에 그는 “의령가례(宜寧嘉禮)에서 살았으며, 호는 수성재(修誠齋. *밀성박씨졸당공파세보에는 ‘수성제 修誠齊’)이다. 벼슬을 버리고 농촌(棄官田廬)에서 퇴계 선생을 따르며 교분을 두텁게 맺었는데, 퇴계는 그의 집 앞 돌에 ‘嘉禮洞天’(가례동천)이라 썼다(從遊講學契誼深厚 退溪題堂前石面曰嘉禮洞天).”고 되어 있다. 이 책의 ‘학행유일편’(學行遺逸篇)에는 박운은 “벼슬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와 성심으로 학문을 연구하였는데, 퇴계 선생은 그 마을을 수성(修誠)이라 이름하고, 그 골짜기에 ‘가례동천’(嘉禮洞天)이라 적었다(棄官歸田廬誠心講學 退溪先生名其里曰修誠題其洞曰嘉禮洞天).”고 되어 있다. 류필영(柳必永:1841〜1924년)이 쓴 박운의 묘갈명에는 “청백리에 기록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경치 좋은 곳(의령현 가례)으로 돌아와 수성정사(修誠精舍)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며 세상을 마쳤다(錄淸白吏遂辭官 歸隱點泉石勝 致築修誠精舍 逍遙自適而終).”고 되어 있다.
위에 나타난 ‘嘉禮洞天’(가례동천)의 ‘洞’(골짜기 동)은 오늘날 지방 행정 구역 단위와는 다르게 ‘골짜기’라는 뜻으로 쓰이었다. ‘동천’(洞天)은 골짜기가 하늘처럼 경치 좋다는 뜻에서 출발하여, 국어사전이나 자전(字典)의 어휘 활용에서 ‘산과 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신선이 사는 곳’ 등으로 뜻풀이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신선이 사는 곳’, ‘황홀하게 경치 좋은 곳’을 뜻해 왔다. 따라서 ‘가례동천’(嘉禮洞天)은 ‘가례에 있는 산과 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뜻을 지닌다.
박운(朴芸)과 관련된 여러 기록을 보면, 조선 전기에 ‘백암촌’(白巖村)과 ‘수성’(修誠)은 같은 의령현 가례(嘉禮)에 속하면서도 각기 다른 마을임을 알 수 있다. 퇴계가 박운(朴芸)이 살던 마을을 ‘수성’(修誠)이라 이름하고, 그의 집 앞 골짜기의 돌에 ‘嘉禮洞天’(가례동천)이라 글자를 적었다고 했는데, 2012년 현재 그 글자가 남아 있는 지점은 행정 구역상 가례면(嘉禮面) 가례리(加禮里)에 속한다. 현재의 수성리(修誠里)는 가례리(加禮里)에 붙어 있기는 하나, ‘嘉禮洞天’(가례동천) 글자가 있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져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수성(修誠) 마을과 2012년 현재의 수성리(修誠里)는 위치가 서로 가깝기는 하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허원보가 처음 건축하여 ‘백암’(白巖)이라 현판을 걸었던 백암정(白巖亭)의 지점은 현재 가례면 가례리(加禮里)에 속하면서 의령천(내 이름)과 의령읍 서동리가 만나는 지점 가까이에 있다. ‘嘉禮洞天’ 글자는 현재의 가례리(加禮里)의 중심 지점에서 약간 북쪽에 있고, ‘백암정’은 ‘嘉禮洞天’ 글자가 있는 곳에서 남동쪽으로 약 800m 거리에 있다. 조선 전기에 백암정은 허원보가 살던 마을 백암촌에 속했을 것이므로, 그 당시의 수성 마을과 백암촌 마을은 서로 남북으로 잇닿아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조선 전기에는 의령현 가례에 인구와 마을 수가 적고, 당시의 수성과 같은 이름의 수성 마을(수성리)이 지금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수성 마을은 지금의 수성 마을(수성리)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조선 전기 백암촌(白巖村)의 지명 변천
의령군 가례면 인터넷 홈페이지와 ‘의령군지’ 상권(300쪽. 2003)에는 “가례란 지명은 마을 이름과 면(面) 이름이 한자로는 다르지만, 한글로 적거나 부를 때는 꼭 같다. 면명은 아름다울 가(嘉)를 쓰고 동네 이름은 더할 가(加)를 쓰고 있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분명한 근거가 없다.”고 했다. 현재 면(面)의 이름으로는 ‘嘉禮’(가례)면이라 쓰고, 마을 이름으로는 ‘加禮’(가례)로 쓰는 근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2012년 현재의 가례(加禮) 마을은 백암촌(白巖村)에서 가례(嘉禮)로, 가례(嘉禮)에서 가례(加禮)로 그 지명이 변천해 왔음과 그 변천한 까닭을 밝히고자 한다.
조선 전기 허원보가 이름 붙여 살던 백암촌 마을은 그때의 수성 마을과는 같은 위치가 될 수 없었다는 점과 허원보가 건축한 백암정(白巖亭)이 현재 가례(加禮) 마을(加禮里)에 있으므로, 허원보가 살던 백암촌(白巖村) 마을은 현재의 가례(加禮) 마을로 지명이 변천했다고 본다.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 제도는 조선 전기 성종 16년(1485)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등재된 면리제(面里制)가 기본이 된다. 5호(戶. 집))를 1통(統)으로 하고, 통(統)을 모아 리(里)를 구성하고, 리(里)를 모아 면(面)을 구성하는 개념이다. 경국대전이 완성될 즈음은 허원보가 가례로 이주한 시기와 비슷하다. 이 면리제(面里制)는 조선 전기에는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면(面)은 방위면(方位面)이라 하여 각 군(郡)이나 현(縣) 아래 동면, 서면, 남면, 북면을 두었고, 각 방위면에 여러 리(里)를 두었다. 이 면리제는 군역(軍役)과 노역 배정, 조세 분배 등 국가의 수취 체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리(里)가 그 주요 단위가 되고, 면(面)은 수취 업무 행정 처리를 담당했다.
의령현의 경우 ‘의령군지’ 상권 136〜138쪽(2003)에 따르면, 조선 후기 정조 때 만들어진 1789년 ‘호구총수’ 자료에서 의령현 서면(西面)에 풍덕리(豊德里), 가례리(嘉禮里), 칠곡리(柒谷里), 모아리(毛兒里), 대곡리(大谷里)가 있고, 가례리(嘉禮里)에 갑을(甲乙), 고나리(古羅里), 가례(嘉禮), 지남(旨南)), 대천(大川) 마을이 있다. 이들 마을은 순수 자연마을(자연촌)과는 개념이 다른 행정마을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수성 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본다. 여기서 ‘가례리’라고 한 것은 오늘날의 가례면에 해당한다. 가례리(현재 가례면) 안에 가례리와 꼭 같은 한자의 가례(嘉禮) 마을이 있다. 나는 이 가례(嘉禮) 마을이 조선 전기의 백암촌(白巖村)의 지명을 이어받았다고 본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종전의 가례리(현재 가례면)가 일가례면(一嘉禮面)과 이가례면(二嘉禮面)으로 나누어져, 1912년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에 일가례면에 우항(牛項), 봉림(鳳林), 양성(陽城), 개승(介承), 세변(細邊), 우곡(牛谷), 괴진(槐津), 수성(修誠) 마을이 있고, 이가례면에 진목(眞木), 운암(雲巖), 봉두(鳳頭), 지남(指南), 대천(大川), 어은(漁隱), 가례(加禮) 마을이 있음을 본다.(‘의령군지’ 상권 138쪽. 2003). 그리고 일가례면과 이가례면은 일제강점기 1913년 총독부령 제111호 ‘도의 관할구역과 부군(府郡)의 명칭 및 위치 관할구역 조정’에 따라서 하나의 가례면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가례면의 가례(加禮) 마을이 오늘날의 가례(加禮) 마을로 같은 한자로 그 지명이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조선 전기 허원보가 지은 백암정(白巖亭)은 백암촌(白巖村)에 있었는데, 현재는 그 백암정이 가례(加禮)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백암촌(白巖村)은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가례(嘉禮) 마을로 지명이 바뀌었다가, 조선 후기 이후에 종전의 한자와는 다른 가례(加禮) 마을로 지명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의령현 가례(嘉禮)의 백암촌 마을이 가례(嘉禮) 마을로 지명이 바뀌게 된 까닭은 당시 가례가 인구도 적고 생산량도 적은데다가 가례에서 가장 번창한 마을이 백암촌이어서 가례와 백암촌을 동일시한 데서 백암촌이 가례(嘉禮)로 불리다가 완전히 가례(嘉禮)라는 지명이 백암촌(白巖村)을 대치해 버린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조선 후기를 지나면서 가례(嘉禮) 마을을 한자가 다른 가례(加禮) 마을로 적게 된 까닭은 면리제(面里制)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가례(嘉禮)면과 가례(嘉禮) 마을을 같은 글자로 쓸 경우 동자이의(同字異義. 글자는 같으나 뜻이 다름)의 불편이 많았기 때문에 그 불편을 줄이기 위해 가례(嘉禮) 마을은 가례(嘉禮)면의 한자와 달리하여 가례(加禮) 마을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고 본다. 면리제에서는 국가 수취 체계에서 리(里) 단위로 군역(軍役), 노역, 조세 배당을 하고, 면(面) 단위에서는 이를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므로, 문서상으로 면 이름과 마을 이름의 글자가 같을 경우 큰 혼란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맺는말
나는 조선 전기에 허원보가 의령현 가례에 이주해 옴으로써 그와 그의 후손과 인척은 조선의 15세기 전성기에는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16세기 말 임진왜란(1592〜1598년) 때는 구국의 역사적인 사명 활동을 다하였음을 ‘의령신문’에 소논문으로 세 차례 기고한 바 있다. 그 소논문의 내용들은 지금까지 잊어졌던 의령군 가례면의 인물 중심의 중요 역사를 밝힌 일이기도 하다. 이에 이어, 이번 논문에서는 조선 전기 허원보의 의령현 가례 이주에 따라, 당시 의령현 가례(현재 의령군 가례면) 지역의 주요 지명이 어떻게 새로이 형성되고 어떻게 불리었으며, 오늘날 그 지명이나 지명의 위치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밝혀 보았다. 이를 두루 살피면, 의령군 가례면은 역사적 인물의 향기와 역사적 지명 가치가 위대한 땅임을 알 수 있다.
지명의 생성과 변천을 학문적으로 밝히는 것은 학계의 중요 과제 중의 하나이다. 이번 논문을 조선 전기의 지명 연구의 하나의 수확으로 생각하여 계속 좋은 연구가 따르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글이 가례면사무소 인터넷 홈페이지와 ‘의령군지’의 내용을 보완하거나 수정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ㅇ김일손, 탁영선생문집(영인본). 자한서원탁영선생문집간행소. 1994. ㅇ김해 허씨 세보(권1). 1936. ㅇ밀성박씨졸당공파보편찬위원회 편, 밀성 박씨 졸당공파보(권1). 봉양재. 1990. ㅇ뿌리찾기범국민계몽회 편, 밀성 박씨 졸당공파 가승. 박영태 등 발행. 2002. ㅇ의령군지(상권). 의령군지편찬위원회. 2003. ㅇ퇴계학연구원 편찬, 정본 퇴계전서, 퇴계학연구원 인터넷 홈페이지. 2007. ㅇ허만길, “김해 허씨의 의령 정착 과정”, 의령신문 제298호 2012. 3. 23. ㅇ허만길, “의령군 가례를 몹시 사랑한 허원보의 삶”, 의령신문 제305호 2012. 7. 13. ㅇ허만길, “의령군 가례를 사랑한 허원보의 자녀와 인척”, 의령신문 제310호 2012. 9. 28. ㅇ 허만길, 시 “가례”, 의령문학 제16호. 의령문인협회. 2012.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