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에 각 성씨들이 모여 살게 된 과정을 글로 남긴다면, 주요 역사 자료가 되리라 생각하면서, 나는 김해 허씨(許氏)들이 의령군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적어 보기로 한다.
▲ 시조는 김수로왕비 허황옥
김해 허씨의 시조는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 ?∼188년)이다. 수로왕(재위 42~199년)은 열 아들을 두었는데, 왕비의 청에 따라 두 아들로 하여금 허씨 성을 따르게 하였다. 열 아들 중 맏아들은 수로왕을 이어 거등왕이 되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서기 103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서 모두 성불하여 수로왕이 지은 하동 칠불사에 일곱 부처의 탱화(불상 그림)로 모셔져 있다.
6세기에 가락국이 망한 뒤 허씨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살았고, 나중에 나누어진 여러 본관(분본관, 분관)과 중조(중시조, 분관조)가 나오게 되었다. 김수로왕비의 35세손 허염(許琰)은 김해(경남) 허씨의 중시조가 되고, 33세손 허강안(許康安)은 하양(경북) 허씨의 중시조가 되고, 30세손 허선문(許宣文)은 양천(경기도) 허씨의 중시조가 되고, 30세손 허사문(許士文)은 태인(전북) 허씨의 중시조가 되는 등 많은 새로운 본관과 중시조가 나왔다.
의령군에 살고 있는 김해 허씨의 중시조는 허염(許琰)인데, 그 일가친족이 김해를 삶의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허염은 고려 11대 왕 문종 때 출생하여 삼중대광(최고품계 정1품) 가락군(駕洛君)으로 봉해졌다.
▲ 1480년 전후 예촌 허원보 가례 이주
허염(許琰)의 현손(고손자) 허유전(許有全: 1243~1323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인데, 시호(죽은 뒤에 국왕이 주는 호)는 충목(忠穆)이다. 1314년(충숙왕 1년)에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1321년 문하시중(영의정, 국무총리에 해당)이 되었다.
허유전의 손자 허기(許麒)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살았는데, 호는 호은(湖隱),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이 난을 일으켜 송경(개성)을 함락하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양파(陽坡) 홍언박(洪彦博), 청구당(靑丘堂) 조계방(曹繼芳),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행촌(杏村) 이암(李嵒) 등과 함께 왕의 피란 수레를 따르며 공을 세우고, 익위장군보승중랑장(翊衛將軍保勝中郞將)이 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이존오가 신돈(辛旽)의 죄를 임금에게 올리다가 중벌을 받게 되자, 이존오를 구하기 위해 왕에게 직언하다가 공민왕 15년(1366년) 경남 고성(철성)에 있는 섬 죽도로 유배되었다. 5년 뒤 유배에서 풀리고 임금이 벼슬을 주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시를 주고받으며 한가롭게 지냈다. 고성에 온 지 26년 뒤 1392년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키자 고려 충신으로서 절개를 지켰다. 조선 숙종 13년(1687년) 유학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흠모하여 고성에 도연서원(道淵書院)을 세우고 위패를 모시었다.
허기의 세 손자 중 장손 허려(許旅)에게 허원필(許元弼), 허원보(許元輔), 허원질(許元質) 등 세 아들이 있었다. 허원보((許元輔: 1455~1507년)가 혼인 후 새살림을 의령현 가례(嘉禮)에서 꾸렸는데, 이것이 김해 허씨가 의령현에 본격적으로 살게 된 계기이다. 그때는 혼인 시기가 빨랐다는 점과 허원보의 장남 허수(許琇)가 1478년에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1480년 전후로 허원보가 가례로 이주하였으리라 본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허기의 둘째손자 허시(許施)의 둘째아들 허의선(許義先: 허원보의 사촌)이 현재의 의령군 봉수면 죽전에 이주했다.
▲ 지명은 가례(嘉禮), 호는 예촌(禮村)으로
조상들이 높은 벼슬을 한 까닭으로 허원보의 아버지는 고성, 창녕, 함안, 의령(의령읍, 가례, 칠곡, 대의) 등지에 산과 논밭을 꽤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유학자이며 시인이며 교육자인 허원보가 의령현의 가례를 이주지로 택한 동기는 김해 허씨 족보와 비문 등에 나타나 있다. 족보에 허원보는 자는 몽득(夢得), 호는 예촌(禮村)이며, 26살에 사마시(소과)에 합격하였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효와 우애에 힘썼다고 되어 있다. 족보와 그의 묘비문(묘갈명)에는 일찍이 가례(嘉禮)의 흰 바위(백암白巖)와 산수를 사랑하여 백암정(白巖亭)을 짓고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우랑(佑郞)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2년 04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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