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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특집기고 - 1 극로, 한글과 함께한 치열했던 삶

이종수 (사)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재)한글학회 감사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04일











▲ 이종수
의령출신 한글운동가 이극로 박사를 기리는 글짓기대회가 지난 8일 한글학회 주최로 그의 고향인 의령에서 처음 열려 눈길을 끌었다. 이극로 박사는 해방 이후 북한에 잔류했다는 이유로 이념의 벽에 부딪혀 잊혔으나 최근 학계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의령신문은 이번 글짓기 행사를 계기로 그를 기리는 기념행사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하면서 이종수 (사)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의 기고를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던 1945년 10월 9일 일제의 탄압 때문에 중단되었던 한글날을 복원하는 기념행사를 위해 2만여 명이 넘는 수많은 시민이 덕수궁 중화전 앞에 모였다. 지금으로 치면 광화문 광장에 모인 수십만 명의 인파에 견줄 만 한 당시로서는 대규모 기념 행사였다. 환희에 가득 찬 인파들 사이로 어느 한 남자가 일제의 가혹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기념식사를 위해 연단에 오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엔 한평생을 동고동락해온 한글이 다시 태어나는 날을 맞이하는 감격으로 여러가지 감회가 스쳐지나 갔다. 그는 연설을 시작했다. ‘일제의 언문박멸 정책 아래 한글날이란 역사적 기념일을 잊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새로운 광명에서 이 날을 기념하게 된 것은 다 같이 조선민족의 행복이요 감격입니다. 앞으로는 해마다 이 날을 우리의 한글날 명절로 지킬 것입니다. 이 한글날은 우리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이 날을 정성껏 지키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이어 모든 참가자들은 그가 직접 작사한 한글 노래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세종 임금 한글 펴니 스물 여덟 글자 사람마다 쉬 배워서 쓰기도 편하다. 온 세상에 모든 글씨 견주어 보아라 조리 있고 아름답기 으뜸이 되도다. 오랫동안 묻힌 옥돌 갈고 닦아서 새 빛 나는 하늘아래 골고루 뿌리세. 슬기에 주린 무리 이 한글나라로 모든 문화 그 근본을 밝히려 갈거나’.


이날 한글날 기념식사를 맡은 사람은 조선어학회(한글학회 전신)의 간사장으로서 한글 운동을 몸소 이끌었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모자로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견디면서도 한글 운동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러나 후에 월북 인사라는 낙인 속에 우리의 역사 페이지에서 고스란히 삭제되어 기억 속에서 잊힌 한글 독립운동가 고루 이극로(1893-1978) 선생이다. 한 시대의 격변기를 몸소 살다간 그의 국내외에서의 치열했던 삶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의 ‘한글 사랑’이다. 그는 민족의 정체성과 영속성을 모국어에서 찾았으며 그러므로 자연히 그의 한글 사랑은 학문으로서의 관심뿐만 아니라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럼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한글운동의 1인자였던 그는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으며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극로는 경남 의령의 빈농 출신으로 네칸의 초가에서 20여명이 되는 식구가 살아야했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에는 전통적으로 선비출신이 많았으나 가정형편이 곤란하여 자유로이 서당을 드나들 형편은 못되었다. 그러나 남달리 배움의 의지가 강했던 그는 농사일을 거들다가도 서당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를 틈타 쓰고 남겨진 종이를 이용해서 글을 익혔다. 남달리 의지가 강한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어린 이극로가 맨 먼저 하는 일은 찬물에 머리를 감는 것이었는데 한겨울의 추위에서도 이것은 어김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 그러는 이유를 이상히 여겨 물으니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이극로의 인생에 대한 자세를 잘 보여준다. 후에 중국 마적단에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는 등의 몇 번의 죽을 뻔한 고비와 힘들었던 해외 유학생활, 그리고 사전 편찬을 위하여 하루에 한 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으며 일하는 고행 속에서도, 또한 일제의 가혹한 고문 속에서도 그는 항상 또렷한 정신으로 위기를 헤쳐 나갔다. 해방 후 나태해진 국민들을 향하여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또 일본에 경제적 식민지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의 자서전 ‘고투 사십년’에서는 이런 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춥고 덥지도 아니한 기후로 과연 이상적인 지상낙원이다. 이러한 곳에서 많은 자연의 혜택을 입고 사는 우리민족이라 안락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국민이 안락에 빠지면 그 국가가 미약하거나 멸망하기 쉽다’.


정신을 차리고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본 이극로는 이대로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농부가 아닌 다른 삶을 살아 보겠다는 이극로의 욕망은 결국 두 번의 가출로 이어졌고 결국은 마산 창신학교를 다니게 되는데 물론 집에서 학비를 대줄 형편은 못되었으니 날품팔이를 전전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창신학교 재학시절에 한 중요한 일화가 있는데 이것은 이극로가 가야 했던 인생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호주출신의 한 교사가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조선 청년의 용기가 부족해서이다’라고 하면서 ‘용기 있는 자는 저 강물에 뛰어들어 봐라’라고 조선학생을 비꼬았다. 이에 이극로는 격분하여 진짜로 강물로 뛰어 들었다. 강물은 역사의 소용돌이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강물에 뛰어든 용기는 그 역사에 당당히 맞서는 이극로의 강인한 정신이다. 이때부터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일컬어져 ‘물불’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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