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는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독립과 통일운동을 전개한 민족주의자다.
이극로는 일제시기나 해방정국기 사회주의 단체나 좌익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 일제시기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해방정국기에는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헌신하였다. 문제는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왜 북한에 잔류하였는가에 있다. 그가 북쪽을 선택한 것은 남한의 정치상황이 그를 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김구 선생과 함께 참석한 그가 북한에 잔류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수용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발언(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 같은 해 6월 8일 이극로는 이용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이 무렵 이극로는 이승만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좌우가 싸우지 말고 단결하여 건국하자’고, 좌우단결을 통한 민족국가수립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되었다.
둘째, 해방정국기 친일파가 활보한 남한의 정치 현실을 수용하기 어려워하였다. 미군정은 한민당을 지원하면서도, 친일파를 청산하는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고문하였던 악질 고등계 형사(안정묵)가 해방 이후에도 경찰 관료로 근무하고 있고, 애국지사(이윤재 선생)의 아들(이원갑)이 처벌받는 해방정국의 현실에 이극로는 분개하였다. 이윤재의 아들인 이원갑이 아버지를 죽인 형사가 경기도 광주경찰서에 취임하여 근무하고 있었다. 안정묵 형사를 응징하고자 애국청년들이 광주경찰서를 습격, 방화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 경찰서 습격사건에 이윤재의 아들인 이원갑도 합세하였다. 이 사건의 주범 가운데에 이원갑도 체포되었다. 이원갑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고등법원에 공소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극로는 이윤재의 아들을 위해 특별변호로 나섰다. 그는 “애국 열사의 유족으로서, 부친의 원수가 다시 광복된 이 새 나라의 경찰로 등용된 것이 공분을 자아내게 한 이유의 하나이다. (중략)해방된 새나라가 애국 열사의 가족을 보호하지는 못하고 이렇게 극형에 처하는 것은 민족적 양심에 부끄럽다.”고 변론한 일이 있었다.
또 하나의 사례로 의령 출신 안호상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이극로가 해방 뒤 친일파들이 일제시기 독립운동가였던 백산 안희제 선생(1885-1943;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함.)의 재산을 부채를 핑계로 빼앗아 가는 등의 행위를 못 견디어했다고 한다.
셋째, 미군정기 남한의 백색테러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정치활동을 하면서 미군정의 남한의 테러 방치를 비판하였다. 통일민족국가를 세우려고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한 여운형에 대한 테러에 분노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남북연석회의 기간 동안 김일성의 잔류 권고가 작용하였다. 김일성이 “선생이 북반부에 남는다면 할 일이 많다. 함께 손잡고 민족문화도 건설하고, 우수한 우리나라 언어도 발전시키자”는 권고를 그가 수용하였다고 한다.
이극로는 해방정국기 진보적 민족주의자여서, 남한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같은 겨레가 있는 북쪽에서도 국어교육을 정립하는데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북쪽에 잔류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