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함안 대산면 서촌리 악양나루터 근처에 세워진 경위는 김영복(경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씨가 ‘처녀뱃사공’의 노랫말 배경이 함안의 악양나루터라는 함안 지역주민의 얘기를 듣고 관계자를 수소문해 사실 확인을 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음.
김영복씨의 말에 의하면 1989년경, 가요 처녀뱃사공의 작곡가이신 한복남 선생을 만나 작곡을 하게 된 과정을 묻자, 윤부길 선생이 이끌던 악극단이 지방을 돌 때 함안의 어느 나루터를 건너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주막 근처에는 악양루라는 전망이 좋은 누각이 있었으며 거기서 보고 들은 사연이 노랫말의 배경이라 말해 주었다고 함.
가요 처녀뱃사공을 불러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고 황정자 선생의 장남 김민수씨도 당시 노랫말의 배경이 함안이라는 것은 어머님에게서 들어서 잘 알고 있다며 직접 함안군에 전화를 걸어 알려줬음.
또한, 한복남 선생으로부터 윤부길 선생의 악극단원 중 밴드마스터(별명 점백이)가 생존해 있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하여 만나 들은 이야기로는 배를 탄 날은 함안 방목장(5일)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6일)으로 가는 길목에 강나루터가 있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주막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강을 건널 때에는 악극단의 인원이 20여 명이고 악기와 장비 등이 있어 3∼4회 왕복하여 건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함.
또한, 저녁을 먹고 나서 일행 중 몇 사람이 섹스폰을 들고 옆에 있는 누각에 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는 말을 듣고, 김영복씨는 처음 듣는 방목장(나중에 지금의 가야장임을 알게 됐음)이란 명칭과 한복남 선생으로부터 들었던 누각에 대한 기억이 일치함을 근거로 함안의 악양나루터를 이용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함.
악양나루터의 배는 노젓는 배가 아닌 줄배였고 함안천은 강이 아니라 수로였다는 의령출신 정모씨의 주장에 대하여는, 악양루 맞은편 제방이 1921년에 축조되었고 상류지점에서 신음천과 검암천이 합쳐져 내려온다는 점에 비쳐볼 때 전혀 사실이 아니며, 당시 고기잡이배로도 이용했고 퇴적토가 쌓인 현재보다 강폭이 넓었으며, 남강댐이 건설되기 전이라 수위도 지금보다 높았으므로 노가 달린 배도 있었다고 인근 주민들은 증언하고 있음.
이는 50년대 악양나루터에 띄워진 나룻배의 사진에서도 노가 달려있는 것이 확인되었음.
한편, 노래비문 뒤편에 새겨진 내용에는 악양나루터 주인 박병희씨의 세아들 중 둘째였던 박기준씨가 군에 입대한 후 6·25 전쟁 중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큰아들 박경운씨의 부인과 그 자녀들의 말에 의하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져 확인결과, 박기준씨는 맏형 박경운과 함께 전쟁 이전부터 우익청년단체에서 활동하였는데 1949년 좌익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함.
맏이인 박경운씨는 동생이 피살된 후부터 피신하며 지냈는데 전쟁이 터진 후에는 김해 등지에서 우익단체 활동을 계속했다고 하며 그로 인해 나루터에는 박경운씨의 부인과 셋째동생 박기종씨(당시 학생) 그리고 여동생, 손녀가 남아 집안을 꾸려 나갔다고 함.
우익활동을 했던 박기준씨가 전사자로 기록되어 있어 전쟁 중에 전사한 것으로 비문에 적은 것은 앞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보임.
또한, 윤부길 선생의 악극단 일행이 서울로 올라간 시점(김영복씨는 9·28 수복이 되던 해라고 함)에 대해서도 확인절차를 거쳐야 하겠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