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업무처리에 한때 포기하기도
지역 언론에 집중 보도돼 관심 끌기도
‘처녀뱃사공’의 무대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4월 8일 재양산 의령군 정옥진 향우가 호소문을 함안군에 발송해 이의를 공식적으로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함안군이 지난 4월 18일 처녀뱃사공 노래비문의 이견에 대한 회신을 발송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정옥진 향우가 공무원의 업무처리에 강한 불신을 드러내며 한동안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논란은 3개월만에 정옥진 향우가 지난 7월 17일 함안군의 회신에 대한 반론을 발송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이를 전후하여 7월 11일 의령신문을 비롯해 15일 함안신문, 17일 경남도민일보, 같은 날 경남신문에 집중적으로 보도되면서 관심을 끌었다.
물론 그 사이에 정옥진 향우가 의령군과 함안군을 오가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정옥진 향우는 공세를 늦추지 않았지만 함안군은 간단한 회신만 발송했을 뿐 예상외로 소극적인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의령군 역시 확인되지 않은 민감한 사안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소극적인 자세를 선택했다. 여기에는 이미 2년째 ‘처녀뱃사공 가요제’가 진행되고 있는데다 지방정부 나아가 중앙정부의 신뢰성 문제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의 쟁점은 ▲함안천 수로의 문제 ▲삿대 사용여부 문제 ▲그 오라버니의 문제로 집약된다.
정옥진 향우는 노래비에 표시된 곳은 낙동강이 아닌 함안 수로이며, 지적한 곳에 노가 없는 줄 배이었으므로 당연히 노 젖는 뱃사공이 없었으며, 행불자로 등재된 그 오라버니는 그 이전에 살해돼 이미 없었던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함안군은 당시 악양은 남강댐 건립 전으로 홍수조절이 되지 않는 시기이므로 갈수기는 줄 배를 이용하였으나 그 외의 경우는 노를 저어 강을 건넜으며 비문에 등재된 그 오라버니는 6·25전쟁 당시인 1950년 9월에 사망하여 전몰군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양측 모두 결정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처녀뱃사공의 윤부길 작사자가 이미 고인이고 정옥진 향우가 개인적으로 함안군에 이의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처녀뱃사공의 무대 논란이 현재 전개돼 사실규명에 대한 기대를 아직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옥진 향우의 주장이 워낙 강력한데다 이를 검증하자고 나서고 있고 의령군도 이러한 공세에 보조를 맞추면 경우에 따라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해 주목되고 있다. 유종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