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임란의병(壬亂義兵) 학술토론회 주제발표 논문 요지
김용란기자 기자 / 입력 : 2004년 05월 31일
올해의 제32회 의병제전과 제4회 군민의 날 행사(4.17∼4.23)는 17일 군민문화회관 공연장에서 개최된 ``제2회 임란의병(壬亂義兵) 학술토론회``로부터 막이 올랐다. 사단법인 의병제전위원회(위원장 한우상)와 충익사관리사무소(소장 곽건영) 주관으로 열린 이 학술토론회의 목적은 412년 전 임란 당시 우리 의령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홍의장군과 그 휘하 17장령 및 수많은 의병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다각도로 재조명, 이를 후세에 길이 계승함은 물론 의령.의령인의 정체성과 위상을 드높이는데 있다. 다음은 이 학술토론회에서 발표된 ``郭再祐의 經世國防論 考察``(이장희 전 성균관대 교수), ``경상우도의 의병활동과 남명학파``(김준형 경상대 교수), ``忘憂堂 郭再祐 義兵部隊의 17將에 대하여``(김해영 경상대 교수), ``郭忘憂堂 學問의 特性과 그 發現``(홍우흠, 영남대 교수) 등 4편의 연구논문 요지이다. <편집자주>
■ 곽재우의 경세국방론 고찰 ``주승.병승.방비``는 부국안민의 방안 무 승산전, 상부명령 있어도 불 출전 이장희 박사는 곽재우의 경세국방론을 ▲부국안민(富國安民)의 방안 ▲전략·전술 ▲군비보강책(軍備補强策) ▲산성수축(山城修築) 등 세 측면에서 고찰했다. 망우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 <중흥삼책소中興三策疏>를 올렸다. 그 소의 핵심내용은 국방과 민생의 안정을 위해서는 첫째 주승지도(主勝之道:왕이 자신을 다스려 이기는 방도-인정仁政), 둘째 병승지모(兵勝之謀:군대로써 이기는 계책-적을 먼저 칠 것이며 인재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기용, 예측 밖의 은혜를 베풀면서도 형벌과 정치는 엄하게) 셋째 근보지계(僅保之計: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비 태세를 갖추자)가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망우당은 처할아버지 조식에게서 병서를 배웠으며, 부친이 의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따라가서 깊은 지식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망우당의 전략, 전술은 <춘추(春秋) >의 영향을 받아 바르고 엄했는데, 승산이 있는 싸움에는 적극적으로 임하고 이길 수 없는 싸움에는 상부의 명령이 있어도 나가지 않았다. 임란 중 조선은 성을 지키지 못하고 곳곳에서 왜군에게 패하였다. 이에 조정은 육군을 대거 수군에 편입, 적을 바다에서 무찌르기로 전략을 대폭 수정하였다. 곽 장군은“망하는 것은 수비가 없는 데 있다”라는 말을 들어 수성(守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곽장군은 우리나라 특성이 게릴라전에 유리함을 알고 산성도 이에 맞춰 조성하였다. 산성을 쌓고 지키면 왜군들이 위를 향해 조총을 쏘지 못함도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박사는 이렇게 곽망우당의 경세국방론을 고찰하고, ``세인(世人)의 곽망우당 평(評)’으로 말을 맺었다. ■ 경상우도의 의병활동과 남명학파 독자적 활동, 필요시 연합전 전개 하학인사 위주의 상의적인 남명학풍 영향 김준형 박사는 임란 당시 상황과 경상우도 각 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을 살피고 남명학파의 의병활동 배경에 관하여 고찰했다. 김 박사는 경상우도의 활발한 의병활동을 연구한 결과 ▲경상우도의 의병은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연합하여 작전을 전개하고 ▲이 지역의 사족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의병활동에 참여하고, 군사와 군수물자의 모집, 운반 등의 간접적 지원활동 하였음을 밝혔다. 김 박사는 남명학파가 의병활동에 미친 영향관계를 밝혀 관심을 끌었다. 성리학이 주류이던 조선사회에서 남명학파는 형이상학적인 학문보다는 하학인사(下學人事)위주(실천적인 면을 중시)의 학문을 중시하였다. 남명 조식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상의적(尙義的)인 학풍과 직설적인 현실대응의 자세는 임진왜란 시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경상우도에서의 활발한 의병활동은 역사적, 지리적 조건과도 밀접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나왔듯이 경남 서부지역(거창, 산음, 의령, 진주, 성주, 초계, 함양)은 예부터 토지가 비옥하여 사대부들은 굳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도 넉넉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지역 사족들은 세상일을 크게 조망하는 여유를 가지고 조정의 일에 관해서 직설적인 비판을 하고, 실천적인 입장을 지닐 수 있었다. ■忘憂堂 郭再祐 義兵部隊의 17將에 대하여 초유사 김성일의 의거인정부터 의병활동 본격화 17장령은 의령.삼가 지역의 군수군무 역임자들 김해영 박사는 ▲17장(將)의 군무분장(軍務分掌) 배경 ▲17장에 관한 용사별록(龍蛇別錄)의 기술 ▲17장의 가계와 행적을 통해 <망우당 곽재우 의병 부대(部隊)의 17장(將)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는 기병초기 곽 장군 휘하의 군사로 심대승(沈大承), 권란(權鸞), 장문장(長文章), 박필(朴弼)을 거론하고 있다. 심대승과 권란은 곽 장군의 의병부대가 큰 규모로 확대되었을 때 핵심적으로 관여하지만 장문장이나 발필과 같은 이는 이후 행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정으로부터 정식 군대로 인정받기는커녕 토적(土賊)으로 몰려 해체위기에 직면했던 의병부대는 초유사(招諭使)로 김성일(金成一)이 부임하자 일대전환을 맞게 된다. 학봉은 곽재우의 군사 활동을 의거(義擧)로 인정하는 조처를 취하였고, 초유 활동으로 인해 경상우도 여러 군현의 의병활동이 개시되어 곽 장군의 군사 규모도 커지게 되었다. ``용사일기龍蛇日記``에는 이즈음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조사남과 주몽룡을 제외한 15인의 장령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곽재우 의병부대의 상층 지휘부 인사를 뜻하는 17장령은 바로 이 시점에서 군무를 분장하여 의령과 삼가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하거나 군수지원 업무를 담당했던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사별록龍蛇別錄``에서 17장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곽 장군의 지휘를 직접 받으며 주로 의령에서 작전에 종사한 인물, 삼가에서 군수 지원 업무를 맡았던 인물, 조사남·주몽룡처럼 특정 지역의 전투에서 활약한 인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는 의병장 곽재우와 영장(領將) 윤탁(尹鐸)에 대해서만 다른 16장과는 달리 자(字)와 생년을 기록하여 구별하고 있어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郭忘憂堂 學問의 特性과 그 發現 망우당의 천부적 기질은 호방,엄숙정중 학문적 사승연원은 부친 정암공, 남명 조식 학풍특성은 ``춘추대의``에 입각한 제자백가 통습 홍우흠 박사는 학문이란 학자가 역사와 사회에서 경험한 생활의 정화(精華)를 윤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며 망우당 학문 또한 그런 차원에서 접근해야한다고 보았다. ▲천부개성을 보면 망우당은 타고난 기질이 호방하고 기상이 엄숙 정중하다. 망우당은 호방한 천성이 방종이나 방탕으로 흐르지 않게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엄숙하고 정중한 기상을 함께 타고났던 분이다.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외가와 친가 모두 부유했을 뿐 아니라, 부친 정암공과 그 족친인 현풍 솔례리(率禮里)의 곽씨 가문 또한 사회적인 지위와 학문적 분위기가 좋았다. ▲사승연원(師承淵源)을 보면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부친 정암공에게서 먼저 글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망우당 16세 때,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이 그를 외손서로 선택했다는’표현을 통해 곽 장군과 남명의 학문적 사승 관계도 추측할 수 있다. 망우당은 16세 이전 남명 선생에게서 ``논어(論語)``를 배웠다. 망우당은 임금에게“정치를 하는 도리는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임금께서 선(善)을 밝히고 자신을 정성(精誠)스럽게 하는데 있을 따름입니다...人事를 버려 두고 天理를 담론하는 것은 입에 발린 이치이며, 자신의 책임을 반성하지 아니하고 듣고 앎이 많은 것은 귓전의 배움일 뿐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는 남명이 동년배인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근래의 학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먼지 나는 마당에 물 뿌려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 天理를 담론, 명예 도독질하기를 꾀하여 남을 속임으로써 도리어 남들의 중상(中傷)하는 바가 되는가 하면 그 폐해가 남들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 풍조는 선생과 같은 나라의 지도자가 꾸짖어 그치게 하지 아니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한 것과 같은 논리이다. 남명은 제자들에게 궁리(窮理)와 수신(修身)을 가르치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지양하고 형이하학적인 인간생활을 중심으로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쳐야한다는 것이 기본 지침이자, 자신의 생활철학이었던 것이다. 홍 박사는 망우당 학문의 특성을 ▲중시춘추(重視 ``春秋``)-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그것을 바로잡는데 응용할 수 있는 ``춘추(春秋)``를 중시) ▲관통제자(貫通諸子)-성리학 이외에는 이단으로 취급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제자(諸子)에 통용하여, 도가(道家), 병가(兵家)등을 눈앞에 펼쳐진 인간사회의 시비를 가리고 바로잡는데 응용하였고 보았다. 공자는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이 있다(有德者 必有言)”라 하였다. 말이란 한 개인이 쌓아온 인격과 학문이 겉으로 발현된 형상인 것이다. 이를 들어 홍 박사는 망우당 학문의 발현을 ▲직필과문(直筆科文)-망우당이 34세에 등과했으나 직필(直筆)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됐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그가 ``춘추전(春秋傳)``으로써 학문의 기초를 다진 것에서 연유한다. ▲기의정란(起義靖亂)-``망우당 선생연보``를 보면 ``선생 41세 4월에 왜적이 침입, 모든 고을이 허물어지게 되자 선생은 바로 현풍으로 가서 3대 선영의 봉분을 낮추어 평분으로 고쳤다. 선생이 왜적토벌에 참전하면 왜적이 그 보복으로 조상의 분묘를 해롭게 할 것을 미리 염려하여 후환을 없게 한 것이다. 4월 21일에는 왜적토벌로써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맹세를 가묘(家廟)에 아뢰고, 장사(壯士)모집 후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란 깃발을 내걸었다``고 전한다. ▲토격반역(討檄叛逆)- 망우당이 근왕(勤王)을 핑계로 도망친 경상감사 김수(金 )를 꾸짖는 격문 ``토역소討逆疏``를 보낸 것 ▲거의직론(據義直論)-춘추대의에 입각하여 광해군이 그의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살려야한다는 ``구영창대군소救永昌大君疏``를 올린 것 ▲벽곡수련( 穀修練)-망우당이 본격적으로 벽곡( 穀)을 통해 선도(仙道)를 수련한 것은 49세부터이다. 그러나 ``망우선생연보``(15세조)에 ¨선생 15세에 자굴산에 들어가 책을 읽음에 제자백가를 익숙하게 이해했다. 보리사의 명경대는 바로 선생이 독서 휴식하던 곳이다¨는 기록을 들어 홍 박사는 망우당의 벽곡수련의 학문적 발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리=김용란 기자 27.0매 |
김용란기자 기자 /  입력 : 2004년 0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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