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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신문 |
| 영남(嶺南)의 도유(道儒.경상도의 대표적 유학자)로 추앙받던 응초(鷹樵) 노정훈(盧正勳 1853. 9. 15.-1929. 8. 2.) 선생의 손부(손자의 아내) 강윤희(姜潤熙) 여사의 효부(孝婦) 열녀(烈女) 기념비가 세워졌다. (사진)
지난 11월 14일 후손(장손 노순우)들은 의령읍 만천리 만상마을 서쪽 산(山) 여사의 무덤 옆에 여사를 추모하는 효부 열녀 기념비를 건립했다.
노정훈 선생은 조선 중기 부호군(副護軍.종4품)을 지낸 광주 노씨(盧氏) 구암공파(龜庵公派)의 파조(派祖) 노인복(盧仁復) 선생의 후손이다. 노인복 선생은 임진왜란 직후 현재의 의령읍 만천리 만상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강윤희(본관 진주) 여사는 음력 1898년 8월 21일 아버지 강요형(姜堯馨) 선생과 어머니 윤임야(尹任野) 여사의 장녀로 의령군 용덕면 신촌리에서 태어나고, 1981년 9월 20일(84살) 사망하였다. 노재성(盧在聲 1900. 5. 2.-1939. 2. 5.) 선생과 혼인하여, 의령군 의령읍 만천리 만상마을에서 살았다.
노재성 선생은 유학과 시문 창작이 뛰어나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하였다. 선생의 고조부 노세백(盧世伯 1791-1879. 4. 9.) 선생은 통정대부(정3품)를 지내었고, 증조부 노응규(盧應奎 1831-1880. 6. 30.) 선생은 유학자였다. 조부 응초(鷹樵) 노정훈(盧正勳 1853. 9. 15.-1929. 8. 2.) 선생은 영남(嶺南)의 도유(道儒)로 추앙받았으며, 의령향교 전교(典校. 향교의 책임자)와 의령군 향장(鄕長. 군수의 자문기관 유향소의 우두머리)을 지내었다.
노정훈 선생의 장례는 유림회장(儒林會葬)으로 치러졌으며, 만상마을에 선생을 기념하는 응산정(鷹山亭)이 있고, 응산정 앞에 선생의 제단비가 있는데, 경상남도에서 세운 도비(道碑)이다. 노세백, 노정훈 두 선생은 의령군지(宜寧郡誌) 인물편에 올려 있다. 노재성 선생의 부친 화헌(華軒) 노형용(盧馨容. 호적 노준용 盧準容 1882. 5. 3.-1958. 3. 15.) 선생은 유학자였다.
강윤희 여사는 42살에 남편을 여의고 종가의 맏며느리로서 많은 일들을 성실히 치르면서, 시조부모와 시부모를 잘 섬기고 다섯 시동생과 세 시누이를 잘 돌보아 성장시키었다. 부인을 여의고 혼자 된 시아버지를 15년간 극진히 모시었다. 시아버지가 세상 떠난 지 23년 뒤 강윤희 여사도 84살을 한평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인자하고 덕스럽고 너그러웠으며, 아무리 큰일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처리하면서, 효부(孝婦)와 열녀(烈女)의 길을 의연히 살아왔다.
이에 후손들이 강윤희 여사를 추모하면서 효부 열녀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강윤희 여사가 효부 열녀로서 살아온 일은 여사의 생질 허만길 문학박사(문교부 편수관.국제PEN한국본부 이사)가 의령문화원 발행 ‘의령문화’ 33호(2023년)에 ‘의령읍 노재성 부인 강윤희의 열녀, 효부 행실’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기록하였다. 유종철 기자 (자료 제공= 문학박사 허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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