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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핀 그 길에는

시인.수필가 정영기(신반중 총동창회 고문)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25일
【독자 수필】

능소화 핀 그 길에는

시인.수필가 정영기(신반중 총동창회 고문)

ⓒ 의령신문
오월, 초여름의 열기를 따라 능소화가 핀다. 능소화는 정원에 많이 심지만 야생에서도 드문 꽃은 아니다. 담장을 타고 오르기도 하지만 대개는 오래 묵은 나무 등걸 같은 지지대에 줄기의 잎눈에서 생긴 곁뿌리 같은 것이 활착하여 자신을 지탱하며 자란다.
먼 데서 한 무리의 자전거 행렬이 달려온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외진 강변길에 은륜을 반짝이며 다가온다. 앞서 걸어가는 사람을 피하느라 속도가 잠시 늦어졌다가 이내 빨라진다. 혼자 자전거를 타는 나는 가끔 이런 대열의 꽁무니를 한참 따라가기도 한다. 대열의 앞뒤로 주고받는 신호나 말들이 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 그저 따라가다가 갈림길에서 나는 다른 길을 택한다. 갈림길 사이 아카시아 숲 근처 흐르는 물에서는 길이 잘 든 물새가 자전거를 가만히 바라볼 때도 있다. 며칠 전 일이다. 때마침 꽃이 활짝 핀 아카시아 숲 아래, 높이 오르지 못한 능소화 몇 송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카시아 숲은 짙기만 할 뿐 능소화가 타고 오르기엔 적합하지 않다. 더구나 햇살을 좋아하는 능소화로서는 짙은 숲 그늘에 가려 일조량이 충분치 못해 줄기나 이파리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덤불 같이 짙은 숲은 밖으로는 풍성해 보이나, 스스로 만든 그늘막 때문에 음지가 되어, 속은 비었거나 붙잡고 오를만한 튼튼한 가지를 키우지 못한다. 그래서 야생의 능소화는 높이 오르지 못하고, 긴 줄기가 무릎 높이에서 휘어져 거의 눕다시피 비스듬히 벋은 채 겨우 고개만 들고, 낮은 위치에서 꽃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는 높이 오르지 못하는 능소화의 야생은 저것이 나름의 생태지만, 꽃은 크고 아름답다. 꽃잎은 두꺼워서 꽃 목이 꺾여 땅에 떨어져서도 쉽게 마르지 않고 꽃의 형상을 오래 유지한다. 꽃잎의 표면에 흐르는 점액(粘液)이 내부 수분의 증발을 차단하는 탓일 게다. 어느 야생의 꽃이 능소화만 하던가! 비바람에 휘둘려 꽃은 다 떨어지고, 상처 난 이파리만 드문드문 붙어 있는, 거칠고 뻣뻣한 능소화 줄기를 다발로 묶어 자전거에 싣고 온 친구의 말이다. 예찬 같이 들리지만 느낌은 탄식이었다. 무너진 담벼락 흙더미에서 추려낸 것이었다.
그가 추려다 다시 심어놓고, 꽃이 한 번 피고는 그는 곧 먼 나라로 떠났다. 노을처럼 진한 황등빛이 다사로운 그 능소화는 그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지도 모른다. 곁뿌리가 활착하기 좋도록 알맞게 묵은 나무 등걸을 적절한 시기에 바꿔줄 이가 없는 빈집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심히 따라간 갈림길에서, 뜻밖에 마주친 덤불 사이 야생의 능소화를 바라보며 추억의 산책길을 돌아올 때, 나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꽃의 모습은 어느새 갈림길 물 위에 떠 있고, 꽃에 집중한 나의 시선에서는 착시가 일어난다. 파문이 일지 않는 수면 위에 고요히 흐르는 꽃을 따라 나의 시선도 함께 흐르고,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가만히 떠 있던 물새는 나와 꽃과는 방향이 반대인 역류로 흐른다.
돌연히 굵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길바닥을 때리듯 세차게 퍼 붙고는 한참 만에 멈추었다. 잠시 후 갈라진 구름 틈새로 햇볕이 예리하게 비추는 눈부신 갈림길에 홀연히 능소화 한 송이가 굴러와 있었다. 소나기에 섞여 불던 돌풍에 꺾여 밀려온 것이리라. 꽃의 표면이 유난히 반짝인다.
먼 주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자전거 대열이 갈 때처럼 다가와서는 갈림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그네들의 꽁무니를 따르지 않았다. 몇 번의 자전거 바퀴에 으깨진 꽃송이가 작은 파편으로 부서져 핏자국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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