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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侯將相(왕후장상)이 씨가 없다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입력 : 2020년 11월 10일
장해숙의 故事成語 풀이
王侯將相(왕후장상)이 씨가 없다
ⓒ 의령신문
 계급사회에 있어 계급타파를 부르짖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중국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백성을 혹사하고 탄압한 시기가 바로 이런 말을 한 진승(陳勝)이 살고 있던 무렵이었다.
  진시황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다음 자손들에게까지 천만 년 부귀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착안한 것이 무기의 회수였다.
  민간 사람들은 일체 무기를 갖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수집해 들인 칼과 창을 녹여 서울 함양에다 열 개의 큰 쇠사람을 만들었다.
  다음에 착안한 것이 만리장성을 쌓아 북방의 이민족들이 침략해 오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법을 까다롭고 엄하게 만들어 조금만 잘못하면 잡아다 죽여 버렸다.
미련한 인간들 정치의 묘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이른바 영웅이란 인물들을 독재와 폭정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 든다.
그 중에서도 심한 자가 진시황이었다. 진시황이 죽자 진나라는 몇 해 안 가서 망하고 말았다.
겉으로는 가장 강한 듯 보이면서도 가장 약한 것이 억압된 상태 밑에 있는 질서이다. 이 전무후무한 독재정치 폭압정치를 흔들어 놓은 것이 진승(陳勝)이었다.
진승은 자(字)를 섭(涉)이라 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농촌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가난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재주가 남달라 일하고 난 여가 여가에 글을 읽었고 힘이 세어 씨름도 곧잘 했다.
그는 가끔 이런 소리를 했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다. 내가 내일 대장이 될지 왕이 될지 누가 아는가?” 매일 흙속에 묻혀 땀만 흘리고 있는 그가 왕이 어떻고 대장이 어떻고 하며 떠드는 걸 본 친구들은 미친놈 취급을 하거나 아니면 익살스런 이야기로 들으며 웃어 넘겼다.
그러나 진승은 공연히 떠드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함으로써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초저녁에 닭이 울었다. 닭이 때 아닌 때에 울면 난리가 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진승은 또 이것을 핑계 삼아 호응하는 동지들을 얻어 보려 했다.
“초저녁에 닭이 울면 난리가 난다고 했다. 세상이 어지럽게 되거든 우리도 한번 나가 싸워보자!” 그러나 모두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진승은 울화통이 터졌다. 그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의 뜻을 알겠는가?!(燕雀安知鴻鵠之知哉)

마침내 진승에게 때가 찾아왔다.
진시황이 죽고 진시황의 애첩의 자식인 호해(胡亥)가 그 뒤를 이어 이세 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제에게는 착한 아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태자 부소였다. 그런데 태자 부소는 아버지 시황이 하는 일이 옳지 못한 것을 보고 간한 일이 있었다. 자기가 하는 일은 하늘도 어쩌지 못한다고 자부하고 있던 진시황은 태자를 만리장성으로 내쫓았다. 만리장성에는 수백만의 백성들이 보수 없이 몇 해씩이나 성 쌓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십만 대군은 성을 쌓는 한편 외적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몽념이란 대장이 총지휘관으로 있었는데 태자 부소는 몽념에게로 가서 그의 지도를 받으며 한편 군사를 감독하는 감군(監軍)의 역을 맡고 있었다. 진시황이 객자에서 갑자기 죽게 되자 간신 조고는 이사와 짜고 시황이 죽은 것을 숨기는 한편 진시황의 옥쇄를 훔쳐 부소에게 사약을 내렸다. 부소가 돌아와 황제가 되는 날에는 조고를 비롯해서 이사 등 현 집권층들이 다 실각, 혹은 처형될 운명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몽념은 변이 생긴 줄로 알고 부소에게 이십 만 대군을 끌고 쳐들어 거기를 권했으나 부소는 효자라 약을 먹고 죽었다. 군사를 일으킬 대의명분을 잃은 몽념 또한 자살을 해 버렸다.
그래서 조고의 원대로 호해가 이세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세황제가 등극한 그해(서기전 209년) 칠월 진승은 징병에 끌리러 만리장성의 수비를 위해 떠나게 되었다.
일행은 약 구백 명 가량 되었다.
모두가 하나성 각 고을에서 징발 되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어양이란 곳으로 지금 하북성 밀운현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도중 안휘성 기현에서 비를 만나 대택향이란 곳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버렸다. 회하(淮河)의 지류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습지대라 걸을 수가 없었다.
기일은 점점 박두해 오고 길은 열리지 않고 잠자리조차 마땅찮아 징병되어 온 사람들은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진나라의 법률, 그 중에서도 특히 군법은 너무도 가혹했다. 명령에 위반된 일만 있으면 무조건 사형이었다.
대택향에서 어양까지는 삼천리 길이다. 하루 백 리씩 걸어도 한 달은 걸려야 한다. 하루 백 리씩 걸을 수도 없지만 걷는다 해도 기일을 한 달이 못 남았다. 그런데도 징병관들은 태연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진승은 우연히 구백 명의 징병 속에서 오광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식도 있고 용력도 있고 성격도 원만해서 주위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진승은 오광을 포섭하는데 성공 했다. 그리고 진승은 병사들을 선동해서 불평불만을 터트리게 하는 한편 병사들을 자기에게로 모으기 위하여 미신을 이용했다. 오광을 시켜 잉어 뱃속에다 흰 비단 폭에 진승위왕(陳勝爲王)이라고 쓴 것을 넣어두고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연극을 꾸민 것이다. 귀신이나 도술이 높은 사람이 장래를 알려 준 것이라 해서 병사들 중에는 진승을 두려워하며 가까이 하려는 패들이 늘어났다. 그들이 주둔해 있는 막사 앞 숲속에 사람 하나가 있었다. 진승은 오광을 시켜 여우 목소리를 흉내 내어 이렇게 외치게 했다.
「대초장흥(大楚將興) 진승위왕(陳勝爲王)」
뜻인즉 초나라가 장차 일어나서 진승이 임금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 속에는 갑자기 이상한 공기가 돌기 시작했다. 금방 난리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초나라는 진나라와 거리도 멀었고 나라도 컸으며 끝까지 잘 싸우다가 억울하게 망한 나라다. 진나라가 망한다면 초가 일어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구백 명 병사들은 진승에게로 똘똘 뭉치게끔 되었다. 거기에는 오광의 숨은 공로가 컸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날이 개자 오광은 트집을 잡아 징병관들의 독선적인 처우 방법을 공박 했다.
징병관은 분을 못 참으며 칼을 쑥 빼들었다. 오광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진승이 번개같이 징병관이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아 징병관의 목을 날렸다.
혹은 무서워 떨고 혹은 잘 죽였다고 환성을 울리며 벌통을 쑤시듯 와글거리는 병사들을 진승은 위엄 있고 힘찬 목소리로 진정시킨 다음 일장 연설을 토했다.
“우리들이 살아날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들을 괴롭혀온 진나라와 싸우는 길이다. 우리들의 나라를 우리들의 손으로 다시 일으키자! 우리 백성들만이 벌레 같은 대우를 받아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진승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여 끝에 가서 이렇게 소리 높여 외쳤다.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느냐. 양반상놈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일어나라 앞으로 나아가자! 우리 다 같이 뭉쳐 원수의 진나라를 쳐서 무찌르고 우리들의 낙원을 건설하자!”
그의 웅변에 도취된 군중들은 같이 소리 높여 외쳤다.
“뭉치자! 나아가자! 싸워서 이기자!”
그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수백 명 농민병들은 곧 기현 고을을 함락 시켰다. 울분에 쌓여 있던 농민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고 진승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한 패는 동으로 진격해서 동성을 공격하고 진승 오광의 주력부대는 서쪽으로 진(陳)을 향해 갔다.
진승이 진으로 입성 했을 때 군사는 이만 명을 넘었다.
진승은 진에서 스스로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라 불렀다.
장초의 뜻은 초나라를 크게 만든다는 과도정부적인 임시 국명이었다. 즉 호랑이처럼 무섭게 보이던 진(秦)에 항거해서 처음으로 농민을 바탕으로 한 혁명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중국 역사를 통해 농민봉기의 새 정권이 수립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또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이상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진섭세가(陳涉世家)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망하고 초한(楚漢)의 팔년풍진 끝에 중국판도가 다시 한으로 바뀐 것도 실은 이 진승이 첫 봉화를 올림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비롯 성공은 못하고 말았으나 그 용기와 의지를 높이 평가하여 뒷사람들은 큰일의 앞장을 설 경우 “진승 오광이 되겠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비 참새가 어찌 기러기의 뜻을 알랴? 하는 말과 “왕후장상이 씨가 없다”는 말은 영원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입력 : 2020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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